<아가씨>(The Handmaiden, 박찬욱)
영화 <아가씨>와 <캐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6월 29일에 쓴 글입니다.
<아가씨>가 LA비평가협회를 위시하여 미국 지역 비평가 협회 상을 다수 받고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 올립니다.
이용철이 말했듯이 <캐롤>에서 테레즈와 캐롤은 시선의 억압 속에서 살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1950년대가 배경이고, 이 시간은 두 여자의 사랑을 구속하는 공기를 효과적으로 재현해낸다. 그래서 두 여자의 세계 밖에 위치한 누군가의 순간적인 시선조차 억압의 분위기를 내뿜게 한다. 일례로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되는 그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에서 테레즈와 캐롤은 자신들의 대화 속에 불쑥 끼어드는, 앞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한 남자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캐롤이 테레즈의 어깨를 터치하는 그 별것 아닌 스킨십은 금단의 구역에 손을 댄 것만 같은 아찔한 떨림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연히 서쪽보다 더 보수적일 것만 같은 동양, 그것도 음양의 조화를 떠들어대며, 심지어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계몽이라는 이름 하에 깨우쳐진지 20년 좀 지난 1930년대의 조선반도를 배경으로 한 박찬욱의 <아가씨>는 놀라울 정도로 '천연덕스럽다.' 이 느낌은 마땅히 당혹스럽기도 했다. 여러 평론가들 말처럼 박찬욱 영화 중 가장 명쾌하기도 했다. 두 여자의 사랑이 어색하고 낯설 사람들에게 시치미를 툭 떼고, '왜그래?' 하는 순수한 표정을 짓는 영화라는 느낌도 들었다. 이 '천연덕스러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가씨>의 '천연덕'은 이 이야기가 판타지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이것은 어쩌면 단점일 수도 있다. 전 세계의 큰 형님으로 여겨지는 미국이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여 푸르른 지구를 무지개색으로 물들였다는 사실이 무색하리만큼 아직도 2016년의 곳곳은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이 당당하다. 현실이 그러할진대, <아가씨>의 히데코와 숙희가 호쾌하게 남자들을 엿먹이고, 자신들의 사랑이 동성애라는 것에 단 한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의미가 있겠냐는 거다. 그저 대리만족에만 머무르는 판타지가 오히려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캐롤>이 좋았던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의 사랑이 '거센 눈보라를 이겨내고 피어난 한 송이의 꽃처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꽃이 지닌 의연한 생명력은 보는 나로 하여금 이성의 끈을 놓게 하고 기꺼이 감성의 바다로 허우적 거리게 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라스트 신,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어떤 외부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오롯한 것으로 거듭날 때, 금기와 억압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를 공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가씨>의 사랑은 달랐다. 그들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억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비뚤어진 남성들의 욕망을 엿먹였다. 그러니까 남성 권력에 의해 짓눌린 건 숙희의 구원 이전의 히데코 삶이었지,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인 적은 없다. <아가씨>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고 역설적이다. 남성의 섹스는 신사복을 입고 점잖은 모습으로 사유의 영역에서 고상한 척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진정한 섹스가 아니다. 그들은 '좆대가리'를 형상화한 뱀으로 겁을 주며 '무지의 경계'를 그었지만, 정작 그 '좆대가리'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진짜 섹스을 하는 히데코와 숙희의 모습은 그들과 대조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코우즈키가 자신을 속인 백작을 잡아다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에서 히데코의 맛이 어땠냐고 묻는 그 장면은 변태스럽고 역겹지만, 처량하기도 하다. 섹스도 돈도, 그리고 무엇보다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와인을 주문할 수 있는 귀족의 에티튜드도 얻지 못한 채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던 백작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허상으로 가득 찬 남성 권력을 파괴하는, <캐롤>의 사랑보다 더 진취적인 위치에 있다. 숙희가 서재에 들어가 그 좆대가리(뱀)를 부수고 책을 훼손할 때와 그를 보고 머뭇거리다가 뒤이어 어설프게 자신도 그 더러운 책들을 훼손하는 데에 일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더없는 쾌감을 준다.
또한, <아가씨>의 '천연덕'은 계급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일찍이 이동진은 <캐롤>을 이야기 할 때, 두 여자의 계급의 차이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언급했다. 테레즈가 캐롤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상하게 손님은 테레즈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하는 것은 테레즈였다. 캐롤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진을 찍는 일을 즐기지만 제대로 된 카메라가 없는, 백화점 직원의 신분인 테레즈와 그 비싼 물건을 고민없이 선물해 줄 수 있는 밍크 코트를 즐겨 입는 캐롤의 계급은 표면적으로는 대등할지라도 그 간극이 여실히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가씨>는 표면적인 계급의 차이가 선명할진대, 매우 자연스럽게 전복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그동안 내가 씻기고 입혔던 것들 중에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었나?" 하는 히데코를 바라보는 숙희의 속마음은 그가 단순히 옥주(=타마코)로 신분을 위장했기에 나온 태도는 아니다. '씻기고 입혔던 것들'이라는 말이 가진 뉘앙스는 숙희는 그 자신을 애초에 종으로서 생각하기 보다는 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입장으로서 이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울음을 달랠 때 사케를 먹여 재우거나, 목욕을 할 때 달콤한 사탕을 먹이는 것을 다 큰 어른인 히데코에게 적용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히데코와 백작의 사이가 잘 되어 간다는 이유로 화가 나 중앙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고, 과일을 뒤엎어 버리는 식의 행동은 숙희라는 캐릭터의 당돌한 성격 그 너머에 계급이 허물어지는 의도가 보인다. 심지어 히데코는 버섯을 따러 가겠다는 숙희에게 "나도 같이 갈까?"라고 제안하지 않나.
결국 <아가씨>는 지난 해 퀴어 영화계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게 된 <캐롤>과 확연히 대비되는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다소 판타지적이라는 면에서, 히데코와 숙희를 소설 속 이야기의 테두리 안에서만 소비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에서 단점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그들의 선실 섹스 위로 떠오른 휘영청한 보름달은, 달의 성쇠 그 자체가 그들을 상징한다는 기호적인 측면을 차치하고,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동화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히데코가 이모부의 야한 책을 통해 얻은 간접 경험으로 숙희와의 섹스를 실현한 모습에서 대담한 조롱을 배운다. 그 야한 책에 나온 것처럼 서로의 다리를 엇갈고 대칭을 이루며 "타고난" 사람처럼 섹스를 하고, 또 이모부가 자신을 혼내던 그 방울을 그 야한 책에 나온 것처럼 입에 넣고 성기에 삽입함으로써 또 다시 숙희와 대칭을 이루며 쾌를 추구하는 것에서 나의 태도를 성찰한다. 억압을 의도적으로 감지해야 할 이유가 어디있느냐고. 그저 태연하게, '천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