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을 가장하다.
누군가 좋은 조언을 해줘도, "지금 이게 최선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이야기하며 귀담아듣지 않는다. 은연중에 자신의 선택이 그래도 지혜로운 일이라 여긴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무언가로부터의 도피라는 생각까지는 닿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최선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선택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최선은 고통이란 것으로부터 도망쳐 도착한 곳을 가리키며 그게 곧 '고착'이다. 최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도달한 도피처를 최선이라 믿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에니어그램은 그것이다.
통합이란 그런 추방된 자의 최선이 아닌 씻어냄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두려움과 굳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린 도망칠 이유가 없고 그것이 바로 통합이다. 굳이 최선을 추구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최선을 살게 된다. 놓음으로써 도달하는 곳이다.
따라서 9가 3을 따라 한다거나 3을 닮으려 하는 것은 결코 통합이라 볼 수 없다. 3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놓음과 거리가 있는 또 하나의 잡음, 혹은 메임이다. 9가 대립에 대한 두려움을 놓으면 자연스럽게 3과 같이 성취하게 된다. 우리는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최선이라는 도피처를 찾아 도망갈 뿐이다.
9유형인 나는 누군가와 싸우지 않기 위해 "동의"라는 방법을 배웠다. 상대방의 의견이 나의 의견과 완전히 상충되더라도 그 사람의 의견이구나 하고 이해하며 동의해버린다. 그동안 나의 의견은 전혀 주장되지 않는다.
최근 깨달은 것은 나는 누군가와 싸우며 대립적인 상황에 처할 때 몸을 사르르 떨며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그런 사실을 알고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알아도 공포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직 대립이라는 상황이 끝나야만 겨우 사그라들곤 했다. 고착이라는 것을 처음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옳은 주장을 해야 할 때도 상대방이 나에게 감정적인 날을 세우고 있다 느껴지면 그런 공포가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남에게 쉽게 동의하는 것"은 아주 좋은 "최선"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통합'적인 행동이라 느꼈었다. 나의 최선이란 결국 나의 고착이며 도피다. 에니어그램의 고착이란 그렇다. 겉보기에 현명한 선택을 했다 느낄 수 있다. 9가지 유형은 모두 다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유형이라 부른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정말 최선의 행동인가?
씻어내기 전에는 절대 최선이란 있을 수 없다. 대신 우리는 항상 도피처를 최선이라 이름 붙이려 할 것이다.
통합이라는 환상을 버리라는 말은 본인의 어리석고 약함을 알아차리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약함과 상처받음을 외면하며 "무조건 동의"하고 상황만 모면하던 내가 치유될 수 있을까?
상처는 도망치지 않아야만 바라볼 수 있다.
당신의 최선은 최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