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35p
표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말이나 행위가 아니어도 됩니다. 음률이나 붓의 터치, 공예, 비디오나 사진, 춤, 옷 입기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요리나 마당 가꾸기 같은 것들도 좋지요.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인식의 원천이 됩니다. -56p
글쓰기와 예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우리는 특히 예술(은 배고프다), 재능과 가성비라는 개념에 겁을 먹고 인색해진다. 그러나 예술치료는 말치료와 함께 (그나마) 쉽고 효과적이다. 우리는 다 아프고, 치유가 필요하고, 즉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하고, 나아가 색채나 리듬을 부여할 수 있는 표현법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매일 각성하고 매일 겸허해진다. 만국의 노동자여, 여성이여, 각성하라(?)고* 외치는 한편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아직 1%도 알 수 없다. 그것이 나의 특권이다. 모름이라는 특권. (어떻게 모를 수 있지?) 그럼에도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개인사는 희생된다. 쉽게 말해, 가진(것처럼 보이는) 자이기에 드러내기 힘든 상실과 고독, 트라우마가 있다.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터져나오기 시작한 글이 있었다.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에 대해 집중조명하는 ‘자아성찰’ 에세이였다. 이후 자기계발서 성격의 인스타(외 여러 플랫폼) 공략집인 <셀럽의 조건> 및 ‘열등감’ 에세이를 쓰다 픽션으로 넘어갔다. 내가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페터 비에리는 그랬어야만 했다고 말한다. 이 책(+수전 손택)을 특별히 맞춤 추천해준 여르미 작가는 과연 책무당벌레**였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6p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26p
타인의 인식과 우리의 자아상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자아상이 자기기만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49p
가공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실험실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서 드라마적인 전개라는 수단으로 혼란스러운 내적 세계의 한 면에 특수하게 밝고 선명한 빛을 비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7p
우리는 언어의 낯섦에서 다른 정신의 낯섦을 배울 수 있습이다. -78p
새해 결심으로 단골템인 독서, 영어, 운동은 ‘당장 필요한’ 기술이라기 보다는 내 삶을 지탱하기 위한 루틴이고, 이와 같은 긴급/중요(프랭클린 플래너에 나옴)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일은 모두에게 어렵지만 꼭 필요하다. 가장 욕망하는 목표가 빛날 수 있게 빛을 쏘며 자주 바라봐 주어야 한다. (한도연, <미술관으로 숨은 엄마>) 우리는 다 급한 일에 치이며 살지만 또한 내가 결정하는 삶을 살 의무가 있다. 휩쓸리는 삶은 나를 방관자로, 가해자로 만든다. 책임지는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연’이자 ‘서술자’이자 ‘화자’로 살기를 바란다.
프레데리크 그로의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데이먼 영의 <독서의 태도> 리뷰로 이어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산책덕후한국언니 브런치북,
<산책이 제철>에서 관련 챕터를 볼 수 있다.
이 글이 포함된 매거진에 수록된
여르미 작가의 <마흔에 읽는 인문학 필독서 50>에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소개되어 있다.
페터 비에리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