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은 종말>, <너의 유토피아>
<저주토끼>를 시작으로 차곡차곡 수집한 정보라의 단편집 7권이 모였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 수록된 2010년대 작품에서도 죽은 자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자들의 디스토피아는 그녀만의 스타일로 스토리 덕후를 사로잡았다. 물론 <장화홍련전>이나 <폭풍의 언덕>에도 환장하지만(그리하여 강화길의 모든 작품을 거의 다 읽어가는 중이지만) 사실은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요술 모자와 무민들>의 골수팬이라 시베리아를 건너온 듯한 정보라의 기담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저주를 걸어도 귀여운 토끼와 양이라니! (무민이 원래는 트롤이었다는 건 다 커서 알았다.)
복수맛집, (주로 본의 아니게) 방랑하는 이방인과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작은 종말>은 그래서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서 더욱 힘차게 빠져들었다. 여전히 뒤집어진 세계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함에도 늘 그래왔듯 지극히 현실적인 단편들. 앤솔로지 수록작이라 너무 짧아서 아쉬운 초단편부터 연작을 소망하게 되는 중편까지 알차다. 특히 작가의 말과 해설은 여기까지 온(?) 보람을 선사한다.
“자본주의 타파하고 지구를 지킵시다 투쟁”
그때 검은깃털은 나중에 자신도 커서 푸른지느러미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냥도 잘하고 물고기도 잘 잡고 바위 벽에 영원히 남을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44p, 무르무란
상은 피를 쏟고 살을 자르면서까지 건조한 하나의 번호나 하나의 색깔이나 초라한 한 단어로 규정되는 법적이고 행정적인 어느 한 분류에 자신을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상은 자르고 맞추고 꿰매어 만들 수 있는 재료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133p, 작은 종말
완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고통을 잊고 충격을 피하고 분노와 원한을 삭이며 그저 꾹 눌러 참고 극복하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만을 어린 시절 내내, 어쩌면 평생 배우고 익혀왔다. 세상에 재구성할 수 없는 악몽, 완화할 수 없는 트라우마, 잊을 수 없는 고통과 삭일 수 없는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은 설득력 있는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238p, 증언
그러나 누군가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도시를 되찾기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 엄마는 그렇게 싸우다 잡혀가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짐 당했다.’ -322p, 행진
<작은 종말>을 읽던 중 <너의 유토피아> 이벤트에 당첨되어 아낌없이 읽는 중이다. 실제 발표시기를 고려하면 <너의 유토피아>이후에 <작은 종말>이 존재했다. 그러니 시간 순으로 읽게 될 독자들은 나와는 다른 전율을 느낄지도 모른다.
<작은 종말>을 통해 짜릿한 뇌확장수술을 경험한 여운을 안고서 <너의 유토피아>에 입장해보니 작은 종말 이전에 존재한 큰 종말은 그야말로 크고도 광활한(spacious) 종말이었다. 인간의 존엄과 지성, 일상의 소중함은 얼마나 작고도 큰 것인지.
나는 다른 기계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충전하기 위해서, 통신하기 위해서 생산되지 않았다. 나는 느리고 약하고 지적인 존재를 내 안에 태우고 멀거나 가까운 거리를 빠르고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는 이동하는 존재이다.
-77p, 너의 유토피아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관련자 모두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상대를 위해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108p, 여행의 끝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십시오. 보통의 남성이 하듯이. -191p, 아주 보통의 결혼
초기 북유럽 누아르 대표작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과 스페인 드라마 <알타 마르: 선상의 살인자>가 연상되는 ‘여행의 끝’의 끝에서 생각났던 영화는 스포일러이므로 생략한다. 남은 4편은 조금 아껴읽고 더 높아진 책탑으로 또 자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