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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15. 2021

영화 리뷰 <암살자들>

21세기 가장 기이한 암살 사건의 재구성


2017년 2월 13일 아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피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CCTV의 사각지대가 거의 없는,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국제공항의 한복판에서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맹독성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를 사용하여 보란 듯이 암살을 벌이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얼마 후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은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과연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일까? 아니면 북한에 이용당한 순진한 하수인에 불과할까?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은 김정남 암살사건을 재구성해 실체를 추적한다. 연출을 맡은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김정남 암살사건이 당시엔 미국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1개월이 지날 무렵이라 다른 이슈로 인해 금세 묻혀버렸다고 기억한다. 대다수 미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김정남 암살사건을 기억은 하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던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2017년 말, '김정남 암살의 숨겨진 이야기'란 기사를 쓴 더그 복 클라크 기자를 만나면서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두게 되어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이야기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활동하는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더그 복 클라크가 2017년 하반기에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낸 후 저한테 연락했다. 원래 암살을 저지른 여성들이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혀 몰랐던 내용들을 들려줬다. 이 여성들이 정말 진실을 말하는지 여부에 대해 지켜보는 것으로도 다큐멘터리로서 매력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암살자들>은 시티와 도안의 음성 파일(이들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상태라 제작진이 직접 만날 수 없었다)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거주 중인 이들의 가족,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 변호사들, 취재 기자들 등 관련된 인물을 두루 만나 2017년 사건 발생부터 2019년 재판 종결까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된 사건 전체를 꼼꼼히 밟는다. 재판 과정은 기자의 메모를 참고하여 일러스트 형식으로 보여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자료는 CCTV 영상이다. 사건 당시 공항의 CCTV 영상은 용의자인 시티와 도안의 결백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물로 활용되었다. 제작진은 변호사들과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건 발생 전후의 CCTV 영상 전체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암살 작전을 진두지휘한 오종길과 하나모리, 시티와 도안을 끌어들인 미스터 Y, 제임스, 미스터 장, 관련자들의 북한 도주를 도운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 현광성과 고려항공사 직원 김욱일, 암살 무기로 쓰인 VX 신경작용제를 만든 화학자 리정철 등 북한 출신 용의자 8명과 시티, 도안 간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간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북경지부장 안나 파이필드와 말레이시아 <비나르 뉴스>의 기자 하디 아즈미는 시티와 도안이 국제 정치란 장기판의 말로써 어떻게 쓰였는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이들은 김정남과 김정은의 권력 투쟁 과정, 김정남이 암살당한 까닭, 말레이시아 정부가 사건을 처리한 방식과 인도네시아 정부, 베트남 정부와 물밑협상을 통해 두 용의자를 석방한 배경을 설명한다. 또한, 북한이 은밀한 기회를 놔두고 굳이 많은 인파가 몰리는 말레이시아 최대의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암살한 이유도 살핀다. 안나 파이필드는 김정남의 암살이 젊은 김정은이 자기 지도력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첫 단계였다는 진단을 내린다.


"여러 면에서 이 사건은 완전범죄입니다. 김정은은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자기 형을 숙청하고, 처형했다는 사실을 통해 세상에 이와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의 잔인성은 한계가 없으며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죠."



시티와 도안은 몰래카메라를 찍자는 북한 용의자들의 말에 속았노라 주장한다. 변호사들 역시 CCTV, 용의자들이 스마트폰과 SNS에 남긴 행적과 북한 용의자들과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이전에 찍은 몰래카메라 영상 등을 증거 자료로 제시하며 두 사람이 훈련받은 암살자가 절대 아니라고 항변한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말레이시아에 왔다가 유흥업소의 종업원으로 전락한 시티와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과 달리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도안은 많은 돈을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넘어갔다는 이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높다. <암살자들>의 프로듀서 제시카 하그레이브는 영화의 또 다른 주제가 젊은 여성에 대한 '착취'임을 밝힌다.


"이 이야기는 매우 특이하며 일종의 괴리감을 자아내서 처음 접하게 되면 일단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 그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게 되면,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은 유명세, 기회, 더 나은 삶과 같은 유혹적인 제안을 받고 나면 다른 이들이 어처구니없다고 여길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특히나 취약계층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암살자들>은 21세기 가장 기이한 정치적 암살 사건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훌륭한 보고서다. 다만, 죽은 사람은 있으나 죽인 사람은 없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 이면엔 이해 관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국제 정세가 자리한다. 김정남 암살사건을 취재한 하디 아즈미 기자는 묻는다.


"지난 2년간 일어났던 일을 보면 정의가 구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의 결말이 과연 정의로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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