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수 18개월 차 버틸 시간을 가늠해 보다.
일만오백칠십육원
그리고
사백이십 달러
삼십 유로
팔십육만칠천육백 루피
남반구 어느 나라에서 쓰이는 이십일 달러
그리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녀석들
봉투마다 담겨있는 지난날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버틸 수 있을까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쓸 수 없는 낯선 종이 몇 장
지갑에 넣어본다.
필요 때마다 돈 뱉는 기계에 찾아가
달러 받아 낍으로 바꿔 생활하던 날들
돌아올 날 되어 남은 생활비 들고 왔는데,
사백이십이면 라오 시골마을 두 달 치 방값은 되겠다 싶다.
보티첼리, 라파엘로, 카라바조
넋 놓고 바라보다가 맘에 남는 엽서 몇 장 손에 담는다.
밥 안 먹어도 눈 배부른 날,
삼십이면 우피치에 종일 있겠다 싶다.
자전거를 빌려 논길을 한참 달리다가
열대의 맛을 시원하게도 즐기다가
대나무로 지은 방갈로 한 채 빌려 낮잠도 잤다가
팔십육만칠천육백이면 그렇게 우붓의 초록에 하루 정도 빠져있겠다 싶다.
파도 타는 사람들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배고파 들어간 식당에서
급한 허기쯤은 달랠 버거와 콜라 한 잔쯤
이십일이면 울릉공의 오후를 든든하게 보낼 수 있겠다 싶다.
봉투에 든 지난 시간들을
원으로 바꿀 생각 대신
다른 원(願)들을 만들어본다.
어디서든 내가 태어난 나라의 돈보다 많구나 싶어
일만오백칠십육원 보단 많아
헛헛한 웃음도 한 번 짓고 만다.
버틸 시간을 가늠해본다.
과년한 딸,
돈 벌 생각 대신 시 쓰고 앉아있으니
이리 태평하여
걱정으로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싶다.
2014년 10월 25일. 퇴사를 했다.
2016년 4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새벽, 손가락으로 지난 시간을 하나씩 세어본다.
6년이 넘도록 25일은 월급날이었는데, 퇴사한지 얼마나 되었나 세어보는, 그런 지난 시간을 가늠하는 날이 되었다. 사실 25일이 그보다 더하게 다가오는 건 보험과 카드값, 각종 후원금이 나가는 날이 여전히 25일이라는 거다. 2년 전엔 그래도 이렇게 빠져나가는 돈보다는 월급이 조금이라도 더 많으니 별로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1, 2만원이 모이면 10만원도, 20만원도 된다는 사실을 씁쓸하게도 잘 알게 되었다.
(전에는 왜 몰랐니, 하고 후회해도 소용은 없으니 패스)
그러다가 3월의 어느 월요일 저녁, '시'를 함께 읽고 나누는 공부모임에 참석했다가 통장잔고를 눈으로 확인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바로 모임이 끝나고, 회비를 걷을 때! 폰뱅킹으로 5천원을 이체하려고 하니, 잔고가 만 얼마밖에 되지 않는 거다. 그래도 회비는 내야지, 하면서 별 내색하지 않고(누구한테 내색을 한단 말인가.) 5천원을 이체했는데, 남은 잔고가 10,576원
10,576원
일만오백칠십육원
한글로 풀어놓으니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닌 것 같아서 이렇게 써본다.
집으로 가는 길, 문득 서랍 속에 들어있는 외화들이 떠올랐다. 여행길에서 돌아와 환전의 운명을 거치지 않고 그저 봉투에 나뉘어 고이 서랍 속에서 살고 있는 그 달러와 루피, 유로, 호주 달러까지 생각이 났다.
3개월, 그리고 다시 찾은 3주의 라오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달러
(ATM에서 달러를 뽑아 낍으로 환전해 살았었다.)
퇴사 직후 떠났던 스페인과 이탈리아 여행에서 남은 유로
인도네시아 발리 우붓에서 보낸 3주의 시간, 그리고 하루 숙박과 세 끼 식사 정도 할 수 있는 남은 루피
그리고 따뜻한 겨울을 살게 한 호주에서 남은 호주 달러까지.
어째, 내가 태어나고 살고 있는 나라 돈보다 타국 땅 돈들이 액수가 더 클까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외환은행에 가서 돈을 바꿔야 하나 생각하는데, 지난 여행이 하나씩 그 생각 틈으로 들어왔다.
"언제 또 나갈지 모르잖아. 달러는 우선 가지고 있어봐. 라오 가도 두 달 방값 될 수 있을 거야."
"우피치 좋았지? 선물처럼 그냥 그 돈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피렌체 다시 가면 또 가보자."
"루피 바꿔서 뭐하게. 가지고 있다가 우붓 가서 좀 쉬자. 잔뜩 초록을 눈에 담고 와야지."
그리고 두 달간의 호주 생각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원으로 바꿀 대신 다른 원들을 만들고 있는 나를 보니, 그저 웃음이 났다.
좋아서.
그걸 또 시로 쓰고 앉아있으니,
태평한 날들이다.
그냥 봐도 아직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