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재선 May 24. 2020

내게 글쓰기를 가르쳐 준 제주도 산책길

글쓰기와 산책의 상관관계


내가 제주도에 집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산책길 때문이다. 제주도는 관광을 와서는 그 진가를 다 알 수 없다. 노을과 바다와 숲과 바람을 내 삶의 배경인양 무심하고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삶도 그것과 닮아간다. 나도 그랬다. 제주도의 공기가 내 일상이 된 후로 내 호흡이 달라졌고 길어진 호흡으로 책에도 집중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피해왔던 글도 다시 쓰고 싶어 졌다. 그것만으로도 제주 한 달 살이를 끝내고 다시 일 년을 계약할 이유로 충분했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집은 한라산 중턱에 있는데 집에서 아래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편백나무 숲이 있고, 집 바로 옆엔 요정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산수국 길이 있다.



삼의 오름 산수국 길



< 편백나무 숲 > 남편이 책을 읽는 기적


한라산 쪽으로 올라가면 관음사가 있는데 그곳에선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사라져 추자도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과 땅 사이를 오가는 신들의 휴식처처럼 느껴진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도 자연을 보며 감탄할 수 있고, 또 자동차로 15분만 이동하면 올리브영과 스타벅스를 누릴 수 있는 시내가 있다는 것. 그게 제주도 일상의 매력이다.


난 날씨가 좋은 날이면 편한 운동화를 신고 숲으로 간다. 목적은 없다. 숲은 뭐든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걸 내게 알려줬다. 그 이야기가 좋아서 숲으로 간다.  


<관음사 입구 >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진다. 난 크리스천이지만 사찰이 주는 고즈넉이 좋아서 자주 간다.


산책의 즐거움은 매일 밤 아로마 오일을 디퓨져에 떨어뜨리고 푹신한 이불속에 파묻히는 즐거움이나 막걸리병을 흔들어 뚜껑을 돌리는 순간의 칙- 소리를 듣는 즐거움과는 다르다.

숲길을 산책할 땐 살아있는 무엇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봄이 오면 죽어있는 듯한 나뭇가지에서 ‘메롱’ 하듯 어린잎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시작해 매일매일 모습을 바꿔가며 나를 놀라게 한다. “ 너무 신기하다~"“아, 너무 좋다!”라는 식상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제주도의 온갖 산책길.


자연이 좋아진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는데... 바꿔 말하면 나이가 들어서 좋은 건 자연을 알아보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 아닐까. 자연은 분명 성숙함과 맞닿아 있다. 고요하게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산책을 하며 거대한 우주 속의 태양계, 태양계 속의 지구, 지구 속의 수박씨만 한 제주도, 그 제주도 속에서 씩씩하게 걷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그런 상상은 나라는 존재를 하찮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온갖 경험과 고민을 허무하게 만들고 내 안의 여러 가지 나를 잠잠하게 해 준다.


<한라생태숲> 숲이 한적하지만 공원 안에 있어서 여자 혼자 걸어도 무섭지 않다.


글을 쓴다면 산책을 하며 시를 외우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핸드폰 카메라로 시 한 편만 찍어서 출발하면 된다. 걸으며 시를 읽으면 새로운 낱말과 운율의 뉘앙스가 내 걸음걸음에 맞춰 나와 함께 리듬을 타는 듯 느껴진다. 내 안으로 스며들어 내 언어와 결합해 꿈틀 꿈들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글이 쓰고 싶어 진다.


바람에 대한 시를 바람에게 읽어주면 혹시 대답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인간이 아닌 모든 것들이 읊어주는 시를 받아 적어 내 이름으로 발표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 나간 상상도 해 본다.

시를 다 외운 후엔 시인이 어떤 순간 이 시를 썼는지, 말줄임표 속엔 어떤 언어가 숨어 있는지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걸으면서 생각을 하면 생각이 지겨워지지 않는다.


 동안 가사를 쓰며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었던가. 하지만 산책을 하면서는 생각 속에서 생각할 것을 찾아낸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생각들을 연결시키고 혼자 기뻐한다. 많은 작가와 철학자들이  걷기와 산책을 그토록 예찬했는지 이제 조금은   같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만성적 불안증을 걷기를 통해 치료했다고 한다. 그가 조카에게 쓴 편지다.


무엇보다 걷고자 하는 열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
나는 날마다 나 자신을 행복 속에 바래다주고,
모든 아픔에서 걸어 나온다.
나 자신을 최고의 생각 속으로 데려다준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 걸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생각을 알지 못한다.
                                                                

 

산책은 마음속을 비우고 머릿속을 정리해 글을 쓸 여백을 만들어 준다. 그 여백을 채울 생각도 정리해 준다. 걸으면서 조금씩 길러진 체력으로 무기력을 몰아내고 졸작을 쓸 용기도 준다. 그렇게 산책은 잔소리 없이 내게 글쓰기를 가르쳐 준다.


작가의 이전글 거절당한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