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3시간 반의 거리는 도착의 기쁨보다는 질림의 탄식을우선케 했다. 유독 흐렸던 영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였던 것은 그곳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은 우박과 무장 군인이었다. 비 예보가 있던 오후, 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떨어지는 우박 알갱이는 더 이상의 제설은 없다는 의지인 양 탄산칼슘 덩어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잘게 떨어지는 우박 알갱이는 세단 승용차의 유리창에 소박하게 떨어졌고, 소복이 쌓일 세도 없이 와이퍼에 떠밀려 흩어졌다. 한편, 총으로 무장한 군인 병사 둘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번 여행의 호스트, 이곳에서 언 5년을 지낸 친구가 근처 원자력 발전소를 지키기 위해 정찰을 돌고 있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시골 전답에 무장군인 둘이 추가됐을 뿐인데 유난히도 삭막한 풍경이 되어버린 것에 신기해하며, 1년 반 가량의 군 생활을 시골 원전에서 지내게 된다면 어떤 장단이 있을까 짧게 생각해보았다. 평범한 시골 도시에서 봄 우박과 무장 군인이라니. 영광의 첫인상이 퍽 창백해지는 순간이었다.
흐린 영광의 갯벌
바다가 있는 고장에 온 이상 첫 끼는 무조건 해산물이었다.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인 구시포로 향한 우리는 터줏대감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영광은 굴비라지만 일행의 우선순위에는 들지 못했다. 모둠 회와 백합 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남도 지역답게 풍성한 밑반찬과 재료의 신선함이 인상적이었다. 이 지역의 대표 소주는 보해의 '잎새주'인데, 도수가 낮고 순해서 반주에 적합했다. 신선한 해산물을 안주로 두어 병 잎새주를 걸치니 여행지에 있는 것이 실감 났다. 여행지의 분위기는 흐린 날씨가 더욱 살려 주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흐린 날씨, 식당 앞으로 펼쳐진 뻘에는 백 마리는 족히 넘을 갈매기들이 강풍을 타고 활공을 즐기고 있었다. 비둘기가 그만큼 있었다면 정말 기겁을 했을 텐데 비슷한 크기의 갈매기는 왜 멋있고 웅장한지 알 수 없었다.
영광 구시포의 만선횟집
수 많은 조나단들
갈매기 떼를 뒤로 하고 영광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로 향했는데, 호스트 친구의 직장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홍보관 등 인식 개선을 위한 발전소의 노력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소소한 이벤트도 진행 중이어서 참여 후 에코백과 충전선 등을 선물로 받았다. 원자력 발전소가 절대 위험하지 않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유럽에서 친환경에너지로 분류되어 꾸준히 원전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처럼 효율을 높이고 리스크를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탈원전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친구가 일하고 있는 발전소의 원자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는데, 시멘트로 뒤덮인 투박한 원자로 두 덩이가 꽤나 존재감이 있었다. 친구가 영광의 호머 심슨이 되어 열 일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빛원자력발전소 홍보관
저녁 먹기 전 소화를 시킬 겸 친구가 지내는 사택의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기로 했다. 연고가 전무한 임직원들이 타지에서 느낄 고립감을 알아서 인지 사택 내 시설들은 매우 훌륭했다. 사택 자체도 단지가 크고 좋았지만, 체육시설이 특히 훌륭했다. 서울에서 좋은 테니스장을 잡기 위해 매번 수강신청급의 광클릭을 하는 나로선 이 부분에서 만큼은 친구의 영광살이가 부러웠다. 대학 시절부터 테니스를 배워 온 친구의 테니스 실력 역시 수준급이었는데, 이제 1년 좀 넘게 배운 테린이인 나를 처참히 짓밟았다. 4명이서 복식경기를 재밌게 치니 어느새 잎새주가 다 소화된 듯했다.
테린테린하다
저녁은 사택 내 바베큐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타지에서 우리끼리 고기를 구워 먹으니 차분하고 좋았다. 우리는 모두 고향 친구들이었는데, 나이를 먹든, 타지에 있든 한결같은 즐거움이 참 좋다. 역시 여행은 장소보다는 동행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영광에서의 1박 2일은 특별한 여행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맛이 가장 무섭 듯, 든든한 동행과 가볼만한 여행지를 고민하고 있다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남도에서의 하루는 어느새 창백했던 첫인상을 뒤로하고 생기 넘치고 상기된 함박웃음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