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moca Dec 22. 2019

"This is Mountain."

대자연 속에서 만난 바가지



경비행기는 생전 처음 타봤지만, 분명 정상의 범주와는 거리가 있는 비행 같았다. 왜 비행 중에 터덜거리는 소리가 나지? 아무리 작아도 이렇게 흔들릴 수가 있는 건가? 산을 오르기도 전에 생존의 위협을 느낄 줄은 몰랐다. 나중에 경험자 친구들에게 들어보니 원래 그렇다고 한다.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좀 심했던 것 같은데..


우려와는 달리 무사히 도착한 루클라는 추웠다. 그럼에도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등산객들의 허브였다. 동네에서도 웅장한 산을 다 볼 수 있어 본격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트레킹을 마치고 묵게 될 롯지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가이드는 내 일정을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한 뒤 출발했다.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내 앞에 펼쳐진 풍경


날씨는 정말 좋았다. 가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아홉 살부터 이쪽 일을 했다고, 달리 할 일이 없어 하게 됐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고 이렇게 여행객으로 히말라야에 머무르고 있는데, 이 친구는 아홉 살부터 어쩔 수 없이 십 년이 넘도록 이곳을 일터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쉬고 있다 보면 포터들이 하나둘씩 지나간다. 무게를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부피의 짐을 허리에 이고 걸어간다. 짐과 묶여있는 밴드를 이마에 걸친 모양새가 허리와 목에 하중을 나누려는 것처럼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포터들은 하루에 20불가량을 받는다고 한다. 한동안 그들의 걸음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들에게 히말라야는 어떤 곳일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곳은 아닐 수도


첫날이라 몸이 덜 풀린 건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자신의 체력이 원래 이 정도였음을 깨달으며 힘들어하고 있을 즈음, 시야에 녹색이 사라지고 오늘 묵게 될 롯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롯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몸을 녹일 공간도 있고, 침대도.. 있고, 음식이랑 차도 나름 구색이 다양했다. 가이드는 위로 올라갈수록 환경이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무래도 물자 조달이 힘들겠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뜨끈한 생강차로 몸을 녹이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더 추워지기 전에 눕는 게 좋겠다 싶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정 덕이었는지 영하를 한참 밑도는 기온에도 푹 잤다. 내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푹 잤다. 첫날 밤을 순조롭게 보내고 나니 다음 일정에 자신감이 붙었다. 고작 3,350m밖에 올라오지 않은 주제에 긴장을 풀었던 나는 반나절 만에 땅을 치고, 아니 땅에 쓰러져 후회를 하게 된다.


다음 롯지를 가려면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단다.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았다. 4,000m 지점을 넘어간 이후 가파르고 험준한 경사가 계속됐다. 처음으로 고산 증세가 왔다. 다행히 두통뿐이었지만 몸도 지쳐있는 상태라 걷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력은 다 뱉어냈는지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즈음, 고개를 드니 더 이상 오를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내 눈높이에 있었고,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심정이었다. 눈부신 풍광을 마주친 감명, 자연을 향한 경외감, 갖가지 복잡한 심정의 조합이 몰아쳤다. 시작한 지 이틀 만에 이토록 영화로운 장면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 순간부터 고산 증세가 사라진 것은 나중에 눈치챘다.


아름다운 풍경에 한참 취해있다 보니 그 이후의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내려가는 길도 험준했지만 올라온 수고에 비하면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저 내려온 만큼 나중에 또 올라가야 할 터인데.. 이런 막연한 걱정이 들 뿐. 둘째 날 목적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가이드는 오늘이 전 일정 중에 가장 힘든 날이라고 전했다.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오늘이 더 힘들다고? 위로는 됐지만 쉽사리 믿기지는 않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곳, 차트라부(Chatrabu, 4,134m)


가이드는 내일 날씨 예보가 좋지 않다면서, 아침에 상황을 지켜보고 하루 더 묵을지 결정하겠다고 한다. 난로 앞에서 차갑고 젖은 발을 녹이고 있을 때, 처음으로 동양인을 만났다. (산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인 동양인이었다.) 일본에서 혼자 왔단다. 괜히 반가워서 드문드문 알고 있는 일본어를 섞어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얘기를 나눠 보니 도쿄에서 오신 누님이었고, 히말라야는 벌써 세 번째인 전문가였다. 이미 정상을 찍고 하산하는 중인데 날씨가 좋지 않아 나흘 동안 롯지에 갇혀 있다고 했다. 오르내리는 여정만큼 버티고 기다릴 줄 아는 힘도 중요한 것 같다. 일정이 늦어지고 미뤄지는 데 연연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쓴다고 나아지는 건 아니니까. 경험이 풍부한 사람도 자연 앞에서는 작은 존재였다.



내 생애 최고의 밤하늘


하루 더 묵으며 고도에 적응하기로 한 다음 날, 문제가 생겼다. 정확히는 문제를 발견했다. 루클라에서 헤드랜턴 사는 걸 깜빡했다. 급하게 가이드에게 물어봤지만 자기는 헤드랜턴이 없고, 새벽 등반을 함께 할 클라이밍 가이드는 5,000m 지점의 롯지에 있는데, 지금 그에게 여분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난처한 와중에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지만 묘안은 없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롯지 주인이 다가왔다.


"내 거 살래? 이걸로 정상을 세 번이나 다녀왔어."

"그래? 어차피 사려고 했으니까.. 얼마에?"

"300달러."


어처구니가 없는 가격에 잠시 얼어붙었다. 20불 주고 사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낡은 랜턴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대신 해달라는 표정으로 가이드를 쳐다보니 오히려 나를 부추긴다. 앞으로의 일정 동안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둘에게 물어봤다. 앞으로 지나갈 롯지에 관련 용품을 파는 곳이 정말로 없느냐고. 없단다. 대답이 너무 단호해 할 말이 없었다.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미 정상을 찍고 온 도쿄 누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가이드와 롯지 주인이 짜고 치는 것 같다. 호구 하나 잡아서 노나 먹을 셈인 것 같다. 누님은 격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이후의 롯지에서 물건을 팔았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긴, 나처럼 정신 못 차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기본적인 물건을 파는지는 관심도 없겠지.


가이드와 논의해봤자 진전은 없을 것 같아 혼자 고민하다가 하루가 지나갔다. 위험한 판단이었지만 일단 출발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벽 등반까지 남은 닷새, 그동안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막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하려는 나를 붙잡고 구원의 손길을 내어준 건 이틀 동안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준 도쿄 누님이었다.


생각해보니 자기는 헤드랜턴이 없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고, 선물이라며 나에게 자기 랜턴을 건넸다.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받아보는 호의에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 고마웠다. 이 은혜를 갚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연락처를 물어보고,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한국산 김과 마스크 팩을 한가득 들고 찾아가겠다 약속했다. (실제로 이 시국이 되기 전에 도쿄로 찾아가 약속을 지켰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똑 떨어진 듯 출발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아직 세상 살 만 하구나!





이틀 후 도착했던 카레(Khare, 5,045m) 지역에서 헤드랜턴뿐만 아니라 갖가지 트레킹 용품을 팔고 있는 롯지를 볼 수 있었다. 대여섯 군데의 롯지에서 모두 팔고 있었다.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했던 가이드에게 물어봤다. 왜 그랬냐고. 롯지 주인과 트러블을 만들기 싫었단다. 너무나 뻔한 변명이었다. 내가 물어보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그 대답은 진심의 여부를 떠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랜턴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와중에 선크림이 땀에 녹아 코에 화상을 입었었다. 롯지 주인에게 연고가 없는지 물어봤을 때, 그런 건 없다며 정색을 하고 건넸던 말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This is Mountain.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뜨고 코 베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