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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ca Dec 25. 2019

생각보다 쉽네요?

하늘이 돕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고도 적응으로 쉬었던 셋째 날 이후 일정은 순조로웠다. 날씨도 좋았지만, 산길이 무척 좋았다. 쩔쩔맸던 초반에 비하면 적어도 '길'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부분 내리막이었던 고테(Kothe, 3,691m), 3시간여의 걸음으로 충분했던 탕낭(Thagnag, 4,358m), 마찬가지로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카레(Khare, 5.045m)까지, 이대로 무리 없이 정상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려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날씨 때문에, 고산병 때문에, 이유는 다양했다. 올라갈수록 헬기 소리가 잦아졌다.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 제 발로 하산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부른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운이 썩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부디 내 운이 하산하기까지 남아있기를.



항상 안개가 자욱했던 고테.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 헬기 맛집이었다. (제일 쌈)


샤워를 하면 고산증세가 심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물티슈로 해결했고, 나도 그랬다. 그래도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고테는 낮 기온이 영상을 웃돌 정도로 따뜻하고 고도 역시 낮은 곳이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4일 차, 일정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샤워를 했다.


롯지 주인은 반 평 남짓한 샤워실을 가리켰다. 옷 벗기도 좁은 공간에 물통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뜨거운 물, 다른 하나는 차가운 물. 알아서 잘 섞어 쓰란 얘기였다. 물 한 바가지에, 아니 한 방울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세상 부족할 것이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히말라야에서의 목욕은 또 다른 신선한 경험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한복판에 있는 샤워(SowER)실


매일매일 달라지는 풍경은 여정의 묘미였다.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곤 했다. 아침에 들을 수 있었던 물소리와 새소리는 언제부턴가 온데간데없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파란 하늘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무리 히말라야라도 열흘을 내리 걸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갑자기 가이드의 표정이 안 좋다. 배가 아프다며 볼일을 보고 금방 따라갈 테니 나 혼자 먼저 가고 있으란다. 밤마다 롯지 주방에서 술판을 벌일 때부터 알아봤다. 가이드도 사람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이럴 줄 알았으면 5,000m 이상 구간만 별도로 가이드를 고용할 걸 후회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그날의 여정은 지방방송 없이 자연의 소리와 함께 평온하게 즐길 수 있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도착한 롯지에서 한참 동안 난로를 때지 않았다.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와 주인에게 물어보니 장작이 부족해 일찍 때지 못했다며 미안함을 전했다. 그러고는 내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고 급하게 불을 지폈다. "Wood is gold." 난로에 둘러앉아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주인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 장작 덕분에 입 돌아가 죽는 꼴 면하는 건데, 금보다 더 귀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때, 옆의 주인장은 있는 힘껏 코를 풀고 그 휴지를 난로에 넣었다. 그렇지. 태울 수 있는 건 다 태워야지. 그런데 옆에 있던 페트병을 꾸깃꾸깃하더니, 설마 싶었다. 그것도 난로에 들어갔다. 이어서 정체불명의 천 쪼가리와 털 뭉치도 들어갔다. 이것은 난로인가 쓰레기통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넣는 모양새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광경을 본 것 같은 이 찝찝한 기분. 오늘 내 수명은 얼마나 줄었을까.



그래도 요리할 땐 아무거나 넣지는 않는 것 같았다..


6일 차, 드디어 정상에 오르기 전 마지막 롯지가 위치한 카레(Khare)에 도착했다. 확연히 기온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워낙 추위를 타지 않는 몸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잘 때 떨어지는 체온은 어쩔 수 없었다. 밤 기온은 깜빡 잊고 내놓은 물병이 아침에 얼음 덩어리가 됐을 정도로 영하를 한참 밑돌았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 해서 이런 날씨에 잠을 청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잃어가는 입맛도 문제였다. 산행 중 충분한 열량을 섭취해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픈 이야기다. 많이 소모하는 만큼 많이 먹어줘야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식욕은 떨어졌고, 그럼에도 배터리 충전하듯 욱여넣는 식사를 계속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잘 걷는 것만큼 잘 먹고 잘 자는 게 중요했고, 또 힘들었다.



진짜 꾸역꾸역 먹었다. 살려고 먹었다.


내일 기상 예보는 맑음, 모레는 오후부터 흐림이었다. 클라이밍 가이드는 정상까지 무난하게 다녀올 수 있겠다고 했다. (카레~정상 구간에서는 높은 고도에서도 무리 없이 안내를 할 수 있는 다른 가이드와 함께 했다.) 몸 상태도 준수한 편이었다. 주마링 사용법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로프와 카라비너의 결착 순서가 헷갈려 계속 거꾸로 했는데, 올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어서 가이드와 같이 어리둥절..


어쨌든 대망의 캠핑과 정상 등반을 앞두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몇 가지 훈련과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시작부터 꼭 필요하지 않은 짐은 챙기지 않아 덜어낼 짐도 거의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푹 쉬고 기도하는 것뿐.




* 지역의 영문 표기와 고도는 에이전시에서 메일로 보내준 것을 그대로 적는다. 구글링으로 나름 크로스체킹을 시도해봤으나 소개하는 페이지마다 표기와 고도가 전부 달라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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