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가장 태초의 지구와 가까운 풍경
카레는 어제부터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햇빛이 너무 강렬해 눈 덮인 하얀 바닥을 보며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덜어낼 짐이 별로 없어 가방 무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장비들 덕에 몸은 더 무거워졌다. 중반에 이르러 빙벽화에 악어 이빨만 한 크램폰을 달고 걷기 시작하니 걷는다는 느낌보다는 몸을 앞으로 가누는 느낌으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다 카레에 있었는지, 갑자기 올라간 난이도로 인한 병목현상인지, 트레킹 중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켜켜이 쌓인 얼음과 눈 속에서 그들이 남겨준 발자취는 나의 길이 되었다.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걸었다. 딱히 그런 다짐을 한 것은 아니고, 쉬고 있으면 너무 추워서.
고산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체력을 빼앗기는 환경인 만큼, 앞선 사람들을 기다릴 순 없었다. 그들을 천천히 앞지르며 아직 온전히 기능하는 내 몸에 감사했다.
가이드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전혀 쉬는 지점같이 생기지 않은 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보니 이것저것 많이 들어있었다. 삶은 감자와 과자, 뜨거운 차 한잔을 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뗐다.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점심이고 나발이고 빨리 캠프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에 바람이 잦아들었다. 가이드는 오늘의 목적지가 눈앞에 있다고 했다. 온통 하얗던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색상과 지형이었다. "Blue ice!" 가이드는 문자 그대로 푸른 얼음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네. 푸른 얼음이네. 나도 보면 안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진짜로 'Blue ice'라는 명칭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
High Camp에 도착했다. 거대한 절벽을 등지고 텐트 군락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 텐트는 가장 안쪽이었다. 내가 짐을 풀고 침낭을 깔아 놓는 동안 가이드는 주방 텐트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 다음날은 새벽 2시에 일어나 산행을 시작해야 하는 만큼 빨리 먹고 빨리 자야 했다. 주방 텐트에서 몸을 녹이고 있을 때 가이드가 집채만 한 얼음을 메고 텐트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설마 싶었다. 얼음은 그대로 냄비에 들어갔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방법인가. 가이드는 이 얼음을 녹여 식수로 마시고 물통에 넣어 껴안고 자야 한다고 했다. 놀란 표정의 나를 보며 이곳의 눈과 얼음은 충분히 깨끗해서 괜찮다며 웃었다. 정말로 야생의 현장이구나 싶었다. 실제로 얼음은 (얼핏 보기에는) 깨끗해 보였다.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현지의 방법이 그렇다고 하니 따라보기로 했다.
억지로 음식을 욱여넣고 나니 따뜻한 물을 먹고 싶었다. 하얗던 얼음은 그새 녹아 펄펄 끓고 있었다. 물통에 담자 미세하게 누런 빛깔이 났다. 내 눈이 이상한 건지, 물통 색깔이 원래 그랬는지, 아니면 물이 진짜로 누런 빛깔을 띠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분명 얼음은 하얗고 투명했던 것 같은데.. 식도 언저리에 음식물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을 이기지 못해 눈 딱 감고 두 모금을 마셨다.
이후 빠르게 해가 졌고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랫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의심되는 건 '그 물'밖에 없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신다면 내일 정상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일한 방법은 남아있는 생수 300mL로 다음날 오후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나름 깨끗한 얼음을 이고 와서 끓여준 가이드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물'은 손을 씻고 이를 닦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가이드가 깨워 시계를 보니 3시였다. 텐트 기온이 낮아 핸드폰이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꺼진 탓이다. 덕분에 일어나자마자 정신이 펄쩍 들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빨리 걸어야 했다. 허둥지둥 장비를 갖추고 밖을 나섰다. 바로 앞에 가이드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을 걸었다.
동이 트면서 지금까지 잠잠했던 고산증세가 시작됐다. 다시 두통이었다. 늦은 출발을 만회하려고 조금 무리했던 것 같다. 점점 줄어들던 앞선 사람들과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가이드는 내가 나름의 페이스를 되찾으려 애쓰는 걸 눈치챘는지, 아무 말 없이 나를 정상으로 인도했다. (정말이지, 말할 기운도 아끼며 올라갔다.)
10초를 가만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은 바람이 불어왔다. 걷기도, 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내 생에 가장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나에게 위로인지 진짜인지 모를 인사를 건넨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하산하는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열에 아홉은 거짓말이라던데.
거짓말이었다. 한 시간을 더 걷고 나서야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정상이 보이니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가이드는 작은 언덕을 가리키며 정상이 코앞에 있음을 알렸다. 마음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한 치 앞만 보며 나아갔다. 정상에서 마주할 감동을 아껴두기 위해 일부러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이드가 나를 불렀다. 도착했다고. 그렇게 메라 피크의 언덕에 이르렀다.
한동안 황망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던 것 같다. 온 세상이 발밑에 있는 듯한 느낌, 세상 어떤 곳보다 하늘에 가까이 닿아 있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감상 속에서 나라는 주체는 빠르게 사라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에 한참 동안 매료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봉우리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그 이름을 알려주었다. 초오유, 에베레스트, 로체, 바룬체, 마칼루, 참랑, 칸첸중가.. 열심히 눈에 담으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메라는 극한의 추위에 몇 초를 버티지 못했다. 한두 장 찍고 나면 꺼지고, 다시 한두 장 찍고 나면 꺼지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결국 체념했다. 사진은 기억할 만큼만 찍고, 나머지는 눈과 마음에 담아오는 것으로. 덕분에 오랫동안 위대한 자연의 일부가 된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이뤘다는 성취감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의 중압감이 어떤 사유의 틈도 주지 않았다. 그저 압도되어 감동했고 흥분했다. 한동안 말을 아끼며 감상에 젖어있을 때, 가이드는 슬슬 내려갈 때가 됐다고 했다. 가슴 뛰던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을 되새기며 하산을 시작했다.
카트만두로 돌아와 검색해본 후 알게 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웬만한 고도까지 올라가지 않는 한, 눈을 녹여 먹는 일은 없어졌다고 한다. 등산객이 늘어난 만큼 쓰레기도 늘어나면서 오염됐기 때문이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던 6,000m 지점도 더는 청정구역이 아니었다. 호텔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기사를 찾아본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고테에서 목욕을 하고 난 물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별생각 없이 롯지에 버리고 갔던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될까, 산행 중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내가 개별적으로 버린 쓰레기는 얼마 되지 않지만 롯지에서 먹고 자는 데 다른 쓰레기가 안 나올 리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산행을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낭만적인 말들로 그것을 신격화한다. 조금 냉소적이지만 이제 미사여구는 넣어두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실상의 우리는 자연 앞에서 겸손하기는커녕 그저 인간의 입맛대로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분명 그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든 공범은 우리 모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