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동생의 일기를 훔쳐보다 된통 걸려 혼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초딩처럼 귀여운 글이라 보다가 성인이 되어버린 동생에게 프라이버시가 생겼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지켜주기 위해.... 아니, 사실 *경고* 먹어서 더 이상 동생의 일기장을 보지 않게 되었다. (서로 엉엉 울고 엄청난 반성의 기간을 보낸 후 다시는 절대 동생의 일기장을 펼치지 않는다.)
나 스스로 얼마나 기록에 진심인지, 5-6년 전에는 페이스북에 내 어릴적 일기장을 공개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관종인가, 기획자인가. 아무튼 나는 남의 기록을 보는 것도, 내 기록을 남기는 것도 매우 좋아하는 기록광이다.
나와 비슷한 기록광이라면, 평소 일기 쓰기 / 한 번쯤 블로그 하기 / 유튜브 브이로그 등에 관심이 많을 거다. 그런 분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소소문구의 <아임디깅 I'm Digging> 전시에 다녀왔다.
칼퇴하고 후딱 가서 금요일 오후 6시 타임을 즐겼다. 롱위캔을 앞두고 있어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전시 리뷰를 보니, 1시간으로 샅샅이 보기는 어렵대서 도착 후 2-3층부터 먼저 돌아봤다. (3층 60%, 2층 30%, 1층 10%) 전시는 5/7까지만 운영되고, 스마트스토어에서 1시간 단위로 예약할 수 있다. 다녀오고나서 사람들이 왜 2시간 예약하는지 바로 깨달음. 가격은 얼리버드 5,000원 / 일반가 7,000원. (얼리버드로 2시간 예약할걸 했지만, 이놈에 느린 손.. 고민하다 2,000원 더씀ㅋㅋ)
3층은 노트 1권을 자신만의 디깅 주제로 견고하게 팠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이미 조금 유명하신 분들) 2층은 각기 다른 직업과 디깅으로 이제 막 기록을 착착 쌓고 있는 사람들. 노트는 놓여 있거나, 숨겨져있거나, 전시되어 있다. 층 별, 공간 별로 전시의 방식이 조금씩 다른 게 포인트.
볼 노트가 많고, 공간마다 편안하게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 3시간 정도 예약하고 느긋하게 책읽듯 노트를 읽고 싶은 공간이었다. 한구석 한구석만 사진 찍으면, 마치 호텔방에 와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한 공간에 사람이 최소 2~7명이 같이 있기 때문에 확실히 오픈된 전시 공간으로 느껴진다.
서랍, 수납장 등에 디깅 스티커가 하나씩 붙어있으면, 그 안에 노트가 있다는 뜻인데 같이 전시보는 사람들끼리 은근한 눈치를 보며 노트를 슉- 빼든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기록자의 노트를 집어든 순간, 보물을 찾은듯 행복해진다. 기획자의 세심한 설계에 감동받고, 재미를 느끼는 걸 보면 난 일단 기획자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어떤 노트가 기억에 남았을까?
기획자, 기록자, 관람자 3가지 시선으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노트를 남겨둔다.
기획자/마케터의 시선
기획자 특. 온오프라인에서 '경험'을 하면 '와, 이래서 좋다. 이건 별로네. 이건 적용해볼까?'하며 여러 인사이트가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그냥 흘러간다. 결국 실무를 할 때 온라인상 쉽게 찾을 수 있는 레퍼런스에 집착하게 되는데, 사실 찐 인사이트는 축적된 나만의 기록에서 나오기도 한다. 알면서 실천하지 못했던 부분을 남의 노트 기록을 통해 배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일' 관련 노트를 꼭 꼭 꼭 제대로 꾸준히 써보자고 마음 먹었다.
1) 기획자 시선으로 브랜드 디깅하기. 2) 사업가 시선으로 BM 뿌시기. 그냥 "와. 여기 너무 잘하네. 참고해야지" 정도가 아니라, 나름대로 디깅하다보면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흥미로워하는 기획자인지, 세상에 어떤 점을 편집점 삼아 '기획'하고 싶은 사람인지 좀 더 명확해질 것 같다.
'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퍽 와닿았다. 제품이든 서비스든 경험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일수록 값어치 있는 상품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것이든 가치있는 걸 만들고 싶다.
편의점에서 새로운 간식 사먹길 좋아하는 나.
요즘엔 이런게 트렌드구나, 싶을 때. 이런 세세한 포인트는 알아두자.고 생각할 때 위처럼 기록해두자.
개인적으로 띵했던, 유튜브 내용 필사.
기록자의 시선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으나, 대충 고마운 사람에게 편지쓸 일이 많아 손목이 저릿해지기를- 이란 뜻의 문장을 읽었다.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선물하고 싶은 나. 편지쓰고 싶은 나(는 어쩔수 없는 F) 가끔 돈 많이 벌고 싶은 이유도 선물하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드는데..ㅋㅋㅋ 그런 내 마음 같아서 찍어봤다.
나만 이렇게 공책 뜯어서 쓰는 거 아니었구나ㅋㅋㅋㅋ너무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내 사랑 포인트오브뷰. 나도 저 페이퍼 좋아서 한동안 갖고 있었는데, 저걸 또 따라 쓰는 사람이 있구나 반가웠던 기록.
끄덕. 뭐든 지나치지 않는게 좋지.
아, 이 분 글씨체 보고 반성했다. 글씨는 사람의 삶을 대변한다는데, 정리되지 않았던 나의 삶은 그 삶 자체로 아직도 삐뚤삐뚤거린다. 와중에 "다른 일을 했더라면 삶이 어땠을까 생각해보셨어요?" "그럼 내 삶이 아니었겠죠"라는 대사가 너무 박혀서, 그리고 그 밑에 쓰여진 나의 일, 나의 직업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말에 너무 동의되어서 찍어봤다.
난 솔직히 아직 그럴 수 없다. 음. 그럴 수 있는 직업. 일. 나의 일은 무엇일까?
울컥.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이 생각나서 그만 울컥해버린 문장들. 난 늙어서도 의미를 찾을 것만 같은데, 어떤 시점에선 절대 그럴 수도 없어서 그게 서러워서 울컥했다. 엄마아빠한테 잘해야지 + 내 세대 때는 또 다를 거다. 할머니/할아버지이 비해 우리 부모님도 또 다른 세대를 살아갈테니까.
오랜만에 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다시 생겼다.
(본질적인 컨텐츠가 중요하다.)
다들 쓰다 마는구나.
왜 우리의 노트는 앞부분만 가득할까. 뒷장까지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얘기인줄. 소소문구 1층을 들어서면서, 별다를게 없는 노트지만 기획 하나 훌륭하다 싶었는데 2-3층 노트를 삭- 돌고나서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그 멋진 기획들 때문에 디깅 노트를 1권 냉큼 집어올 뻔 했다.
사실 무지, 그리드, 시스템 노트가 워-낙 많아서, 귀여운 토끼 스케치북 노트 하나를 집어들었다. 제발 끝까지 써보자.(이쯤 되면 평생 포기 안 하는게 신기)
요즘 나도 식물에 빠져있긴 한데, 물 주는 것만 알지. 그 외 식물 종류는 궁금했지만 디깅한 적 없다. 흥미로워. 내가 무언가 그리면서 기록한 적은 밴쿠버 워홀 때 처음에 살아남으려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레시피'를 열심히 그렸던 적 밖에 없다.
페이스북 올리브 상무님..... 사실 이 날 얼굴 슬쩍 뵀는데 부끄러워서 말은 못 걸었다. 그분의 노트를 보며, 여전히 여러 브랜드를 위한 사랑과 애정이 듬뿍 느껴졌고 본인의 삶을 사랑하는게 너무 느껴져서. 여전히 배우고 싶은게 많은 분이라 존경스러웠다. 언젠가 나도 좋은 디렉터가 되어, 응원대장 올리브 상무님을 뵙고 싶다! (갑자기 팬심 드러내기)
오롤리데이 스티커... 알라부...오롤데..
관람자의 시선
아니.....이 드로잉 천재...관람객 입장에서 눈이 너무 즐거웠다.
2층 전시 중 일부. 참여를 이끌어내는 곳인데, 3층 -> 2층 순서로 와서 이 곳에 들려도 좋을 것 같다.
2층은 솔직히 제대로 다 못 봤다. 3층부터 노렸더니, 3층 위주로 보게됨..
그래도 빠르게 스슥 -봤는데 너무 좋았던 점이 신제품 노트 4개를 각각 소금밭, 매실밭, 밤나무밭, 황금밀밭 이렇게 귀엽게 이름지어 글 쓰는 행위를 밭에 씨앗을 심고 열매맺는 생활로 기획했다. 그리고 각 밭에 기록을 남겨간 사람들의 글을 썸머리 형식으로 저렇게 종이 1장짜리로 간략히 정리해두었다. 목차 같아서 좋았다. 시간상 다 둘러볼 수 없어서 저거라도 챙겨 나중에 곱씹기로!
세상에 어떤 분은 관상을 적으셨다. 찍지 않았지만, 어떤 분이 자신의 관상은 이러이러한데,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라고 적혀있었다.ㅋㅋㅋㅋ자기얼굴에 대한 객관적 팩트와 비하가 섞여 풋-하고 웃음이 났다.
2층에는 각 노트 옆에 기록자의 '짧은 글'이 도장으로 만들어져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어떻게 찍다보니 서로 말이 되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의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마지막 : 감동적인 기록
식물관련 일을 하시는 분의 기록. 자신의 업을 해나가며, 그것에 진심인 사람인 만큼 멋진 사람도 없다고 생각한다.
난 아직 방황중인데,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긴 한다. 얼른 갈피를 잡고 일체화할 수 있는 의미와 재미를 정리하고 싶다.
블로그를 보니, 이 분 글이 좋았다는 분이 많았다.
감사하다. 유난히 감사의 글을 많이 적으신 분이었는데, '감사'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왜 감사일기를 쓰라고 하는지 디테일한 감사노트를 보며 확실히 와닿았다.
라스트. 아. 진짜 3초만에 눈물 흘렸던 기록이다.
엄마아빠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특히 첫 문단에서 자신의 아이가 처음으로 "온이 엄마 좋아"라고 말했던 그 첫 말. 첫 행동이 엄마에게 생경한 경험을 가져다주었을 걸 생각하니 내가 다 벅찼다. 그런 첫 순간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부모님인데, 살다보면 정말 서로 어그러질 때도 많고 서로의 고마운 순간을 금방 잊어 제일 상처주기도 하는 존재가 된다. 한편, 또 다시 서로를 끌어안는 것도 가족이다. 무엇보다 부모님은 나의 첫 무언가를 보고 가르쳤던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의 첫 순간을 돌봐온 엄마아빠에게 감사하며.. 5월을 맞이하자(응? 갑자기..?)
1층- 물건 파는 숍
그 외 아주 간단한 질문과 답변으로, 기록의 지평을 넓혀주는 부분도 있었다.
전시에서 나눠준 스티커 굿즈들. 그 외 카톡플친 하면 엽서도 주고..
또 온/오프라인에서 쓸 수 있는 5천원 쿠폰도 1개씩 준다.
전반적으로 정말 정말 정말, 그 어떤 전시보다 훌륭했고 진정성 있었던 전시였다. 시간이 부족한 건 아쉽지만 애초에 누군가의 노트를 샅샅이 보는 건 원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번엔 그냥 딱 요 정도만 보자. 요 정도의 인사이트를 적용해 내 것으로 만들자. 정도로 생각하게 됐다. 또 언젠가 리뉴얼된 아임디깅 전시로 찾아오기를! :) 그땐 나도 무언가를 깊게 심은 사람이 되어있길 바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