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 개수 속의 이야기
비행기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엔진이 정지하는 시나리오가 꽤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만큼 비행 중 엔진이 정지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엔진이 하늘에서 고장 날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엔진을 많이 달고 있는 비행기일수록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엔진 한 개가 비행 중 고장 난 다면 엔진 4기짜리 항공기는 25%의 추력만을 잃는 반면, 엔진 두 개짜리는 한순간에 절반의 추력을 상실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항을 가서 비행기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엔진이 2개짜리들이다. 엔진 3개짜리는 보이지도 않고, 4개짜리는 우리가 흔히 점보 여객기라 부르는 거대한 비행기들 정도뿐이다. 작은 엔진 4개를 다는 것이 좀 더 안전할 것 같은데, 엔진 2개만 쓰는 것이 유행이라니! 무슨 자신감인 걸까!
공돌이의 노트 #1
물론 엔진이 애초에 고장 나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설령 엔진이 고장 난다 하더라도 비행기가 안전하게 비행하고 착륙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타는 여객기는 엔진 한 개가 고장 나더라도 착륙과 상승이 가능하도록 설계된다. 물론 여전히 비상상황이지만.
자동차나 기차는 긴급한 상황에 빠지면 바로 정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비행기는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착륙하기 전까진 꾸준히 날아야 하기 때문에 근처에 공항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가 매우 중요했다. 1953년 미국은 "엔진 3개 이하의 항공기의 항로는 공항으로부터 100마일 이내에 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엔진이 한 개가 고장 났을 경우 100마일을 가는데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하여 이 규칙은 ‘60분 규칙’(60-minute-rule)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 규칙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던 것인데, 바다에는 공항이 없고, 1시간 안에 대서양이나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비행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북대서양은 노선계의 노른자 땅이었음에도 point to point* 노선을 연결할 엔진 2개짜리 작은 비행기를 띄울 수가 없었다. 항공사는 그림의 떡 마냥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하와이 같은 대양 한가운데의 섬들은 큰 비행기 말고는 날아올 방법이 없어 고립되기까지 했다.
*"큰 비행기는 돈을 잘 벌까?" 글 참조!
60분 규칙을 피하기 위해서는 엔진 4개짜리 점보기를 사용하거나 비행기에 작은 엔진 여러 개를 다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아쉽게도 둘 다 좋은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엔진 4개짜리 점보 비행기는 수요가 많은 노선이 아니면 좌석도 다 채우지 못한 채 적자만 기록하기 일쑤이기 때문에, 바다 건너에 있는 작은 공항을 연결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어 항로 선택에 제약이 많았다. 그렇다고 작은 비행기에 작은 엔진 여러 개를 장착하자니 비행기의 연비가 낮아졌고 유지비는 증가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60분 규칙은 대양 횡단 항로에 큰 장애물이었다.
공대생의 노트 #2
미국은 연방항공국(FAA)의 60분 규칙을 따르고 있었고 미국 외의 국가들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90분 규칙을 따랐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우리가 흔히 타는 '제트 여객기' 시대가 열렸고, 기술이 발달하며 엔진의 고장률도 현저히 낮아졌다. 일각에선 "프로펠러 비행기들이 비행하던 1950년대에 만들어진 60분 규칙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부응해 엔진 수 적은 비행기들의 비행 구역을 제한하는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일단, 한 번에 모든 제약을 풀 수는 없으니 엔진 3개까지는 60분 규칙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항공기 제작사는 기존 점보기보다는 조금 작고, 엔진은 3개를 사용해 바다를 횡단할 수 있는 삼발항공기(Tri-jet)를 신나게 만들어냈다. 항공사들은 이 비행기를 사들여 대양의 하늘 위에 띄웠다.
이때부터 엔진 3개·4개짜리 대형 항공기들은 바다를 건너는 항로에서 활약하고 쌍발 항공기는 육지 위를 날아다니며 작은 공항들을 연결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삼발 항공기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며 하늘길은 조금 상황이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쌍발 항공기들은 여전한 갈증이 있었다. 바다 너머 멀리 날 수 있음에도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을 생각하면 무작정 규체를 풀 수는 없는 노릇. 엔진 고장이 아무리 흔치 않다고 해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쌍발 항공기한테는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재능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 상황.
그렇다면...
아! 시험을 보면 되겠군!
1950년대에 만들어진 규칙에 발전한 제트 여객기들이 규제받는 것은 불합리했다. 이에 까다로운 몇 가지 조건을 통과한 쌍발 항공기들에 특별한 인증을 주어 공항으로부터 더 먼 곳까지 비행을 허가해주게 되었는데, 이 제도가 ETOPS(Extended Twin-engine Operational Performance Standards)다. 매우 긴 이름이지만, 엔진 두 개 항공기도 멀리 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1985년, 처음으로 ETOPS가 시행되며 쌍발항공기들도 멀리 날아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공항으로부터 120분 떨어진 곳까지 허가해주었다. 이와 동시에 쌍발 항공기들을 위한 북대서양 항로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120인승짜리 꼬마 여객기가 용감무쌍하게 대서양을 건너 뉴욕과 런던을 연결하기 시작한 것!
그러나 ETOPS 120분 만으로는 대서양 중심부나 태평양을 통과하는 항로를 계획하기에는 제한이 있었고, 불쌍한 하와이는 여전히 외톨이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이를 지켜보던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 보잉(Boeing)은 점보기에 맞먹는 대형 쌍발 항공기 보잉777을 만들었다. "쌍발 항공기가 작으란 법 있냐! 엔진 2개로 태평양을 건너 주마!"는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ETOPS 180, 그러니까 공항으로부터 3시간 거리까지 비행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에 이른다.
ETOPS 180분의 의미는 대단했다. 공항으로부터 3시간 거리의 원을 그리면 전 세계의 95%를 뒤덮을 수 있다. 이는 곧 쌍발 항공기로 세계 어디든 비행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했다. 또한, 비행기의 크기에 관계없이 어느 공항이든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길의 증가이자 비행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공항으로부터 더 멀리 비행하는 것만으로도 항공 산업의 발전이 왔다니, 거창해 보이지만, 거창했다.
ETOPS 180분 이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항로의 수요에 더 적합한 크기를 제공하는 쌍발 항공기들이 활약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연료를 많이 쓰는 3~4발 항공기들의 가치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효율이 낮았던 3발 항공기들은 빠르게 그 자취를 감췄고, 점보기들의 생산량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엔진의 신뢰도 문제로 한동한 대륙에서 수련해야만 했던 쌍발 항공기들의 세상이 온 것이다!
공대생의 노트 #3
ETOPS를 얻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엔진의 신뢰도가 매우 높아야 하고, 고장이 났을 경우(결함, 화재 등) 공중에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며, 항공사는 임시 공항에 착륙한 후 승객들에 대한 조치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들이 있다.
엔진의 신뢰도가 높아지며 넓어진 하늘길이 가져온 가장 큰 특징은, 작은 비행기들도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요가 있긴 하지만 크지 않아 큰 비행기를 띄울 수는 없었던 바다 건너 항로까지 작은 비행기들이 연결하기 시작했다. 작고 경제적인 항공기들이 더 많은 노선을 누비면서 항공 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늘이 정말로 넓어진 것이다.
항공사들이 멀고 수요가 적은 항로를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초고효율 여객기들은 엔진 둘만으로 멀리 날아다니기 위해서 매우 큰 ETOPS 값을 획득하고 있다. 보잉787은 엔진을 두기만 장착한 항공기였지만 무려 ETOPS-330분을 얻어내며 사실상 세계 어디든 직항으로 비행할 수 있게 되었고 경쟁 기종인 에어버스의 A350도 ETOPS-370분을 얻어 열심히 온지구를 누비고 있다.
이제 우린 알 수 있다. 공항에 가서 보이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이 왜 엔진을 둘만 달고 있는지. 이는 안전성에 대한 보장이자, 가장 경제적인 선택이고, 선택지가 많아진 바다 위 하늘길을 상징하는 것이다. 엔진은 갈수록 안전해지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비행기가 절반의 추력만으로 5시간 이상을 비행할 수 있다는 인증까지 받으니, 이제 유지비가 많이 들고 연비가 좋지 않은 4발 항공기의 필요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즘 날아다니는 4발 항공기는 정말로 크기가 커서 엔진이 4개 필요할 뿐, 안전성 때문에 4개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흔히 안전성과 경제성은 반비례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안전에 신경 쓰다 보면 지출이 많아지고, 지출을 줄이면 위험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안전성을 높여 숨어있던 잠재력이 뿜어져 나온 케이스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알아본 이야기 아닐까.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려요!
참조 사이트:
www.gcmap.com
Wikipedia_ETOPS
Youtube_Small Planes over Big Oceans
사진 출처:
jetphotos.net
airliner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