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야할까, 이륙해야할까? #이륙결심속도 #V1
*머리를 좀 써볼까요? 헷갈려서 그렇지 아주 어렵진 않아요 :)
친구들과 식당에 가면 메뉴를 고르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는 친구가 꼭 한 명은 있다. 이런 친구를 보통 ‘결정장애’가 있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그 친구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자다. 메뉴판을 펼쳐놓고 어느 게 더 만족감을 줄지 고민하며 이 메뉴 저 메뉴 눈길만 열심히 주다가, 결국에는 직관에 의지해 아무거나 고르길 여러 번. 매번 이런 식이지만, 나란 사람은 메뉴판 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오늘도, 아마 내일도 반복할 것이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정도의 고민을 하는 데 결정 장애가 오는 것쯤이야, “내일 짬뽕 먹지 뭐”라며 웃고 넘길 만한 가벼운 일. 하지만 세상에는 훨씬 어려운 결정이 한가득 있다. 특히 결정의 여파가 클수록, 결정할 대상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을수록 우리는 졸이는 마음으로 결정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안타까운 건, 중요한 결정이라고 꼭 많은 시간이 많이 주어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까지 부족하다면, 우리의 판단력은 흐려지게 되고, 결과도 안 좋을 확률이 꽤 높아진다.
제한된 시간 안에 중대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의 집합. 바로 ‘비행’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 움직이는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판단 착오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특히, 시시각각 위치를 바꾸는 비행기가 단단한 지면 근처를 스치듯 지나가는 이착륙 단계에는 이런 결정들이 모여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이륙과 관련된 심장이 쫄깃해지는 시나리오를 하나 다뤄볼까 한다.
여러분은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를 내달리고 있는 비행기의 조종실에 있다. 속도가 점점 쌓이고 날개가 비행기를 들어올리기 시작하면서 바퀴가 활주로를 짓누르는 무게는 차츰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활동 무대를 땅에서 하늘로 옮기기 직전, 갑자기 한 쪽 엔진이 맥없이 멈춰버리고 조종실은 경고음으로 가득 찬다.
엔진 없이 비행하기는 너무 위험하다. 브레이크를 잡고 멈출까? 아, 창 밖을 보니 활주로 끝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활주로가 얼마 남지 않았으면 멈추지 못하고 활주로 밖으로 튕겨져 나갈 것이니 그냥 이륙할까? 아니, 엔진이 고장났으니 속도를 더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냥 멈춰야 할까?
우리가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남은 활주로 길이는 초당 80m씩 짧아지고 있다.
자, 여러분은 멈출 것인가? 그냥 이륙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문제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컴퓨터도 있겠다, 현재 비행기의 속도와 제동 성능 정도만 알면 비행기가 멈추는 데 필요한 거리 정도는 금방 계산할 수 있을테니까. 계산해보고 못 멈추겠다 싶으면 이륙하고, 아니면 멈추면 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것. "멈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0.1초도 아까운 상황 속에서 풀기엔 너무 어려운 문제다. 그렇다면, 시간을 늘릴 수는 없으니 짧은 시간에도 결정할 수 있도록 문제를 좀 쉽게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같다, 다르다', '크다, 작다' 처럼 하나의 기준을 두고 한쪽을 고르는 작업은 빠르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행기가 멈출 지, 이륙할 지를 가를 분명한 기준 하나를 두면 문제가 해결된다. 이 기준보다 크면 이륙하고, 작으면 멈춘다던지, 딱딱 알아볼 수 있는 식으로 말이다.
활주로 밖은 위험하다! 때문에 이륙이든 정지든 비행기가 남아있는 활주로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을 지를 판단해줄 기준을 하나 생각해보자.
공돌이의 노트 #1
이륙 도중 중대한 결함과 같은 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륙을 중단하는 것을 이륙 포기(RTO-Rejected TakeOff)라고 한다. 빠르게 활주로를 내달리고 있는 수백톤의 비행기를 급정지 시키는 상당히 격렬한 과정으로, 비행기를 정지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총동원되어 최대의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간혹 이륙 포기 후 과열된 항공기 타이어가 눌러앉기도 한다고.
이륙을 하기로 결정할 때에는 일부 엔진이 고장나 속도도 이전처럼 잘 붙지 않음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엔진으로 남은 활주로 안에서 비행기를 이륙 가능한 속도까지 가속시킬 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정지하기로 결정한다면, 남은 활주로 길이 안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한다.
무엇이든 느릴 수록 멈추기 쉬운 법이다. 즉, 고장이 발생했을 때의 속도가 느렸다면 정지하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되는 것인데, 만약 반대로 활주로를 달린 지 시간이 꽤 흘러 속도가 붙은 상황에서 정지하기 시작했다면, 육중한 무게가 가진 속도를 차마 다 줄이지 못하고 활주로 밖으로 나가버릴 수도 있다. 너무 빠르면 멈출 수 없다는 언뜻 보면 당연한 이 말은 곧 비행기가 정지할 수 있는 '최대 속도'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문제 발생시의 속도가 이 최대속도보다 느릴 때만, 비행기는 정지할 수 있다.
반면 이륙하는 경우는 어떨까? 엔진이 고장났을 때의 속도가 이미 빨랐다면, 조금만 더 가속하면 비행기는 뜰 수 있기 때문에 줄어든 추력으로도 이륙을 감행해 볼 여지가 있다. 반대로 활주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엔진이 고장나 문제 발생 당시의 속도가 느렸다면? 비행기는 무거운 몸집을 반토막 난 힘으로 엉금엉금 끌고가다가 결국 이륙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것을 정리하면, 줄어든 추력으로도 이륙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 속도'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속도가 이 최소 속도보다 빨라야만 ‘이륙 강행’을 고려해볼 수 있다.
한편, 정지할 수 있는 최대속도와 이륙을 보장하는 최소속도는 비행기의 무게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행기가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비행기를 정지시키기도, 또 엔진으로 끌어 이륙시키기도 어려워지기 때문. 따라서 무게가 늘어날 수록 비행기를 정지시키기가 힘들어져 최대 정지속도는 작아지고, 같은 이유로 최소 이륙 보장 속도는 커지게 된다.
으아 말로 하니 너무 복잡하다! 그림으로 그려놓고 생각해보자!
초록색 선은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는 고장 발생 당시의 속도를 나타낸다. 무게가 무거워질 수록 줄어든 추력으로 비행기를 띄우기가 힘들어지니, 고장났을 때의 속도가 더 빨라야 이륙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빨간색 선은 비행기가 정지할 수 있는 최대 속도를 표시하는데, 무거워질 수록 비행기를 멈추기가 힘드니, 고장 발생 당시의 속도가 작아야 안전한 정지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비행기의 속도가 초록색 선보다 위에 있을 때 비행기는 활주로가 끝나기 전 이륙할 수 있고, 빨간색 선보다 아래 있을 때만 안전하게 정지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고 표를 보면, 표의 왼쪽 부분은 이륙과 정지 둘 다 선택지가 되는 굉장히 이상적인 지점임을 알 수 있다. 즉, 비행기가 가벼울 수록 고장이 나더라도 정지나 이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
반면, 두 선이 만나는 점보다 비행기가 더 무겁다면 (그림의 오른쪽), 비행기가 고장났을 때 이륙도 정지도 할 수 없는, 무조건 활주로 이탈로 이어지는 구간에 비행기가 빠질 수 있다. 비행기가 고장나면 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매우 위험한 경우이기 때문에, 두 선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무게보다 가벼울 때만 비행기는 해당 활주로에서 이륙할 수 있도록 제한을 받는다.
비행 가능한 무게 범위 내에서만 살펴본다면 이제 재밌는 지점이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두 선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속도보다 빠르면 이륙하도록, 이 속도보다 느리다면 정지하는 것으로 정하면, 비행기는 언제나 안전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위쪽은 이륙이 가능한 구간, 아래쪽은 정지가 가능한 구간이기 때문!
자! 드디어 비행기의 이륙과 정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기준은 최대 정지속도와 최소 이륙속도가 만나는 지점의 속도, 이륙결심속도, V1(브이원)이다.
공돌이의 노트 #2
조종사의 반응 시간도 V1을 결정할 때 고려되는데, 그 시간이 문제 발생 후 딱 3초 정도 뿐이다. 조종사는 첫 1초 동안 상황을 인지하고 출력을 내리고, 나머지 2초 동안 항공기 제동과 관련된 모든 장치를 가동시킨다고 가정한다. 결정을 내리는 것 뿐만 아니라 결정이 이행되는 데까지 총 3초 이내가 걸려야하는 것인데, 이륙 전 조종사들이 얼마나 마음의 준비를 할 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이제 이륙 중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남아있는 활주로의 길이를 보며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이륙결심속도인 V1보다 빠른지, 느린지만 판단하면 된다. 조종사는 활주로를 내달리고 있는 비행기의 속도계를 꾸준히 바라본다. 비행을 곤란하게 하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속도계의 속도가 V1보다 작다면 조종사는 그 즉시 비행기의 브레이크를 잡고, 엔진의 출력을 내려버려 비행기를 급정지시킨다. 반면, V1 속도를 지나친 상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조종사는 엔진의 출력을 그대로 둔 채 비행기를 계속 가속시켜 비행기를 띄운다. 이미 활주로 상에서 정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떠야만 하는 상태인 것이다.
실제로 이륙할 때, 비행기가 이륙결심속도에 다다르면 조종사 중 한 명이나 안내음성이 "V1!"이라고 외치고, 조종을 담당하고 있는 조종사는 엔진 추력 조절 장치에서 아예 손을 떼버린다. V1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이제 무조건 이륙이라는 뜻이니, 실수로라도 엔진추력을 줄이지 않기 위함이라고.
공돌이의 노트 #3
V1? V2도 있는걸까? 그렇다! 실제로 V로 표시하는 중요 속도들의 종류는 굉장히 많은데, 그 중 이륙에 필요한 속도는 크게 3가지 정도가 있다. 이륙 결심 속도인 V1, 기수를 들기 시작하는 속도인 VR, 이륙 속도인 V2다. V1을 지나며 이륙을 결심하고, VR을 지나면서 "Rotate!"라는 말을 외치며 조종사는 비행기의 기수를 하늘을 보게 한다. 양력이 강해지면서 비행기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V2에 도달하면 비행기는 안정적으로 하늘에 몸을 맡기게 된다. 이후 속도와 고도가 모두 증가하는 것이 확인되면 "Positive rate!" 라는 말과 함께 조종사는 착륙 바퀴를 접어서 비행기 안에 집어넣는다. (글 끝부분의 영상을 보며 한 번 들어보자!)
이륙 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 내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하는 상황은 비행 전과정에 걸쳐 분포해있는데, 그런 상황에 사용할 기준점들 역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순항 도중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이륙한 공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부를 알려주는 지점인 귀환불능지점 (PNR-Point of No Return), 착륙 여부를 결정하는 고도인 결심고도(DH-Decision Height) 등이 그 예시. PNR을 지나면 연료 부족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 계속 진행해야하고, DH에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거나 착륙하기 힘든 상황일 경우, 비행기는 더 이상의 시도를 중단하고 무조건 떠올라야 한다.
이처럼 비행기의 조종과 관련된 결정들은 비행의 안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하지만 동시에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들이기도 하다. 비행 중 고민에 빠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비행 중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경우에 대해 사람들은 땅에 있을 때 고민을 많이 해놓았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결정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조종사를 보조할 수 있는 기준치들과 매뉴얼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이륙 도중 문제가 발생하는 위험한 순간,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탈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숫자 V1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 덕분에, 안전하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끝으로, 이륙하는 비행기의 조종실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며 (조금은 복잡했던!) 오늘 내용을 한 번 정리해보자.
사진: Airliners.net(T.Laurent, Ruben Hoes)
참고자료: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