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인종, 사회적 계층에 대해서
나이와 장애에 대한 Inclusive Writing을 지금껏 알아봤다. 이 편에서는 젠더, 인종, 사회적 계층 그리고 문화와 종교/정치 상황/체형을 포용하는 글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겠다.
인류는 태초부터 남성과 여성이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회 구조는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 왔고, 언어 역시 그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남성 중심 언어는 여성뿐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사람들까지 소외시킨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 논의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논의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만큼 모든 젠더를 포용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이 카테고리를 ‘성별’이 아닌 ‘젠더’라고 한 이유는 gender와 sex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두 용어는 모두 한국어로 “성별”로 번역되지만 의미가 다르다.
Sex: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Assigned Sex at Birth)을 기반으로 하는 생물학적 구분
Gender: 사회와 문화가 기대하는 태도·감정·행동을 포함하는 사회적 정체성
시스젠더(cisgender)는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 한다. 이러한 이분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논바이너리라고 한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현재 젠더 정체성이 다른 모든 사람
논바이너리(Non-binary): 젠더 정체성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 안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사람
또한, 젠더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구분해야 한다. 성적 지향은 자신의 성정체성과 관계없이 정서적이나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의 성별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게이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라는 젠더 정체성과 게이라는 성적 지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1. 불필요한 성별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상이 남성이라면 언급하지 않았을 맥락이라면, 여성이나 트랜스젠더의 성별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남자 간호사”처럼 특정 직업군에서 남성이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처럼 강조하는 표현도 불필요하다.
2. 고정관념과 편견을 담은 표현은 피한다
남성과 여성을 호칭할 때 이름, 성, 예우 칭호, 직함 등을 일관된 기준과 함께 사용한다.
male, female처럼 생물학적 성을 전제로 한 표현은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를 배제할 수 있으므로 사용을 지양한다.
3. 정체성을 존중하며 정확히 표현한다
영어처럼 성별 대명사(she/he)가 있는 언어에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명사를 확인하고 사용한다. 확인이 어려울 경우, they와 같은 젠더 중립 대명사를 쓴다.
다양한 성적 지향을 포용하기 위해 wife, husband, girlfriend, boyfriend 대신 spouse, partner와 같은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남성을 기본값으로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영어에는 mankind처럼 남성이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듯한 단어가 많은데 그런 표현은 humankind와 같은 대체 표현을 찾아 사용한다.
많은 Inclusive writing 가이드는 단순히 언어적 표현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UI 측면에서도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성별 입력 UI다. 성별을 묻는 화면에서 이분법적인 선택지만 제시하지 않고, 더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하는 것이 권장된다. 이는 성별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하는 구조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다만 성별 정보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수집해야 하며, 불필요하게 요구할 경우 오히려 차별적 경험을 강화할 수 있다.
인류는 태초부터 다양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 특히 영어는 백인 중심으로 재편되어 왔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인종(race)과 민족(ethnicity)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은 피부색, 머리카락 질감과 같은 외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한 분류이다. 민족은 언어, 조상, 문화, 관습, 신념 같은 공유된 문화적 요소를 바탕으로 한 구분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인종적으로는 백인이지만 민족적으로는 라틴계일 수 있고, 아시아인이라도 국적으로는 미국인일 수 있다.
리서치를 하다가 발견한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인종이라는 개념이 자연적인 구분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인위적인 범주라는 점이다. UNESCO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The Race Concept” 선언문에서, 인종 개념이 과학적 기반 부족한 분류 체계이며, 순수한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 인류학회(American Anthropological Association, AAA)에서는 노예 무역 시기에 백인들이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범주로 설정하고, 백인을 흑인보다 우월한 존재로 위치시키는 위계적 시스템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즉, 인종은 생물학적 구분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종은 오늘날 여전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모든 인종을 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불필요한 인종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상이 백인이라면, 언급하지 않았을 맥락을, 다른 인종과 관련된 글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2. 고정관념과 편견을 담은 표현은 피한다
인종 자체로 개인을 규정하는 the Black, the Hispanic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인종을 ‘이국적’이라고 표현하거나, 집단이 아닌 개인을 ‘diverse(다양성이 있는)’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3. 정체성을 존중하며 정확히 표현한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경청하고 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자신을 African American이라고, 또 다른 사람은 Black이나 Nigerian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인종 및 민족 집단을 지칭할 때는 고유명사로 취급해 대문자로 표기한다. (예: Black, White, Native American, Hispanic, Indigenous 등)
인종차별적 역사나 맥락이 담긴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확실하지 않으면 대체어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종차별적 기원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은유나 관용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blacklist, black market, whitelist, white lie처럼 색을 이용해 부정이나 긍정을 암시하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이는 흑인과 백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표성이 낮은 집단의 용어나 상징을 전유하지 않아야 한다. 전유(appropriation)란 특정 집단의 역사·문화·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표현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맥락을 무시하거나 변형해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한동안 유행했던 “결정장애”라는 표현은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상황을 재밌게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경험을 희화화하고 가볍게 소비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사용은 해당 집단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역사적 맥락을 지우거나 왜곡하며, 무의식적으로 차별과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계층은 소득, 교육 수준, 직업, 자산 같은 요인을 기준으로 나누는 구분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조와 언어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을 중심으로 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계층에 대해 언급할 때 중요한 것은 부 또는 학벌과 같은 결과보다는 그 결과를 이루기 위한 기회 또는 접근성의 격차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소수 집단이라 하더라도 상위 계층보다는 하위 계층을 포용하는 방향을 추구하는 데, 이는 Inclusive writing이 평등함(Equality)보다 공정함(Equity)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모든 계층을 포용하는 글을 써보자.
1. 불필요한 계층 언급은 하지 않는다
대상이 중산층이었을 때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맥락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2. 고정관념과 편견을 담은 표현은 피한다
계층 자체로 개인을 규정하는 the poor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특정 사회 계층에 대한 편견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회적 계층을 특정 인종이나 민족, 나이, 장애 여부와 연관짓지 않는다.
3. 정체성을 존중하며 정확히 표현한다
“가난하다” 같은 결핍 중심 언어 대신, 사회 정책에서 주로 쓰이는 “저소득 가구”와 같은 중립적이고 용어를 사용한다.
특정 계층의 경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일반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모든 사용자가 당연히 대학교를 나왔거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포용적이지 않다.
교육 수준이나 언어 능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언어를 사용한다.
Inclusive writing 가이드에서 많이 나오는 카테고리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카테고리들도 이야기 해보자.
문화와 종교
전 세계에는 다양한 문화와 기독교가 존재하지만, 주요 담론과 이를 담은 언어는 서구권 문화와 기독교 중심으로 치우쳐 있다. 또한, 특정 지역에서는 그러한 문화와 종교가 큰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서구/기독교 중심 언어는 배타적이고 거부감을 주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특히 중동과 아랍 문화,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화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지역, 문화. 종교를 분리해 명확히 표현하고, 문화적·종교적 의미가 깊은 언어를 가볍게 소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치 상황
슬프게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늘 전쟁과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 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려면, 군사행동이나 정치·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용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거나 가볍게 소비하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 특정 사건을 가볍게 비유에 끌어다 쓰는 언어는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체형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에는 과체중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포함되어 있을 때가 많다. 정상체중 또는 저체중이 이상적인 미적 기준임을 무의식적으로 전달할 때도 많다. 체중 감량 성공담이나 다이어트를 권장하거나, 지지하는 듯한 표현을 해 이러한 고정관념을 강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대신 건강, 웰빙, 피트니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포용적인 언어라 할 수 있겠다.
세상에는 다양한 체중과 체형이 존재함에도 언어에는 과체중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담겨 있을 때가 많다. 정상체중이나 저체중이 이상적이라는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전달하거나, 체중 감량 성공담을 미화하는 표현은 그러한 편견을 강화한다. Inclusive writing은 다이어트나 체중 중심의 언어 대신 건강, 웰빙, 피트니스를 중심에 둔다. 이를 통해 체형과 관계없이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라이팅을 할 수 있다.
Inclusive Writing은 단순히 남을 상처 주지 않게 말하자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무심코 선택하는 단어와 표현이 사고의 틀을 만들고, 결국 사회적 시각까지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용적인 언어를 쓰는 일은 단순한 말하기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더 포용적인 사고와 문화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꼭 짚고 싶은 개념이 교차성이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며,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정체성들이 교차할 때 삶은 훨씬 복잡해지고, 타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를테면 전시 국가에 사는 장애인 남성 아랍인의 삶을, 비전시 국가에서 살아가는 비장애인 아시아 여성인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서로를 이해하는 언어에 대한 완벽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배움과 관심이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 그리고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 속에서 포용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Inclusive Writing 시리즈
① Inclusive Writing의 시작 - 무해한 글쓰기의 시대
② Inclusive Writing으로 다양성 포용하기 / 나이·장애
③ Inclusive Writing으로 다양성 포용하기 / 젠더·인종·사회적 계층 ◀︎ 지금 읽고 있는 글
④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나이
⑤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젠더 (게시 예정)
⑥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인종 (게시 예정)
⑦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장애 (게시 예정)
⑧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사회 계층·문화, 정치, 종교·외모, 체형 (게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