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묘한 낯섦을 회상하다.
The Namesake(2006) directed by Mira nair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문예 영어 교양 시간에 읽었던 줌파 라히리의 'The Namesake(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 영화화되어 캐치온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보통 영화의 내용을 다 알거나 하면 보통 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캐치온 채널에 광고가 없었던 덕에 이 영화는 그저 무심코 끝까지 다 봐버렸다.
소설이 영화화되는 경우는 많지만 어떤 영화가 어떤 소설을 원작으로 한 거란 말을 들어도 일부러 그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어떤 특별함을 다른 매체와 일부러 비교해 볼 필요는 없다는 쓸데없이 겉멋 든 나의 고집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것을 가늠할 겨를도 없이 순수한 우연으로 마주치게 된 '읽었던 소설'의 이야기였다.
'namesake'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다.
그의 아버지 아쇼크가 23살 때 당한 기차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을 때, 손에 들려 있었던 니콜라이 고골리의 소설 '외투'.
주인공 '고골리'의 이름은 그 니콜라이 고골리의 이름으로부터 지어진 것이다.
그의 아내 아쉬마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고골리를 낳지만 항상 고향 인도를 그리워하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져다주는 문화적 이질감과 충돌에 힘겨워한다.
청년이 된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행한 일생을 보냈던 천재 소설가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못마땅해하고 '니킬'이라는 본명으로 (역설적이게도 그가 아이였을 때는 거부했던 이름) 다시 이름을 바꾼다.
그가 거치는 두 명의 여인, 금발의 아름다운 미국인 '맥신'과 자신처럼 벵갈인이면서 이국 문화 속에서 자란 '모슈미'.
미국에서 태어난 벵갈인으로서, 어떤 불확실한 정체성에 안정을 부여하려 애쓰는 고골리.
그러나 아버지 아쇼크의 죽음은 맥신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자신과 같은 입장이었다고 생각했던 아내 모슈미는 자신을 한 곳에 구속시키기를 거부하며 고골리 아닌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
모슈미와 헤어진 뒤 죽은 아버지가 선물했던 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소설집을 들고 여행을 떠나는 고골리.
그는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자신이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해내고, 그의 어머니 아쉬마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인도로 돌아가며 남편과 함께 했던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남겨진 그들은 그들이 그리워했던, 혹은 거부했던 자기 자신의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지만, 그 자리는 처음의 그것과 같지 않은 새롭게 지정된 삶의 자리이다.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인도영화라 그런지 기존의 인도 영화가 가지는 일련의 식상한 경향들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뛰어난 완성도의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민자들이 가진 타 문화권 안에서의 이질감과 고뇌, 가족 간의 갈등과 유대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소설도, 영화도.
12살 때, 나는 엄마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이름이 놀림을 많이 받았다거나 특이한 이름이었다거나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 이름이 내 삶을 조금 힘겹게 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작명소 사람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엄마에게 분명히 말하지 못했던 걸까.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정말 그 이름으로 살다가 내 삶이 힘들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정말 엄마의 말대로 이름을 바꾸면 무언가가 새로워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었던 건지도.
고골리와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이름'이라는 것, '불리워짊'이라는 것이 가진 너무나 알아채기 힘든 그 중요한 순간의 균열을 나는 경험해야만 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 기묘한 낯섦을 나는 견디어야만 했다.
그리고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 새롭고 낯선 '불리워짊'.
지나버린 옛날 추억을 되새기듯, 가끔 친구들에게 사실 내 이름은 바뀐 이름이야 라고 이야기할 때면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그 기묘한 낯섦.
나를 정의 내리는 익숙했던 어떤 것과 헤어지고
새로운 순간과 다시 시작해야만 했던 어린 날의 그 경험을 회상할 때, 나는 이후의 삶 안에서 수도 없이 부딪혀야만 했던 감당해내기 어려울 만큼 더더욱 낯설었던, 사랑과 고통과 방황의 날들을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기묘한 낯섦을 이겨내고 익숙해져 왔던 것이 삶을 완성해가는 하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으며...
조용히 미소 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