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사유 Dec 29. 2023

길 위에서

발길 닿는 대로, 스페인 <2>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걸었던 그 길 위에 섰다. 부모님과 함께였다. 우리는 체력과 시간을 고려해 프랑스 길의 삼분의 일을 걷기로 했다. 레온부터 산티아고 까지 320km를. 짐을 줄이고 줄여 10kg을 넘지 않는 배낭을 메고 노란 화살표와 지도에 의존해 찬 공기를 헤치며 걸을 때, 나는 이 길 위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비워지기만 했다. 뭔가를 얻어가겠다는 욕심도, 그동안 갖고 있던 고민도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도 다 사라졌다. 하루하루 그날의 목적지까지 그저 걸었다. 걷다가 비가 오면 가방까지 감쌀 수 있는 판초 우의를 덮어쓰고 걸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셨고, 좀 더 지칠 때면 근처의 카페에 들러 쉬어갔다.

길을 걷다 만난 카페, 알베르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다.

     Una cerveza, dos cafés con leche(우나 쎄르베사, 도스 카페스 꼰 레체; 맥주 한 잔, 라테 두 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 위에서 Buen Camino!(부엔 까미노; 당신의 길이 안녕하길 바라는 인사)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아빠는 맥주, 엄마와 나는 라테를 마시며 몸을 덥히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날 걷기로 한 마을에 다다르면 방을 잡았다. 짐을 풀고 씻고 쉬다가 마을을 둘러봤다. 하루 일정이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명료했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평안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하루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길을 잃었다는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지름길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이 걸으며 우회하는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돌아가기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나도 나지만 내 뒤를 따라 걷는 아빠 엄마의 체력에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 더 많이 걸어야 한다는 말을 두 분께 차마 할 수 없었다.


    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 제주도로 다녀온 수학여행이 떠올랐다. 수학여행 일정표에 ‘한라산’이 적혀있었는데 우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등반하는지 몰랐다. 학년 부장 선생님은 한라산에 가는 당일, 우리가 윗세오름까지 올라가 단체 사진을 찍을 것이며, 잘 올라가면 2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공지하셨다.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원하지도 않는 곳을 향해 2시간을 죽어라 걸어야 한다니 말과 생각이 험해졌다. 중턱에 올라 구시렁거릴 힘도 없을 때, 선생님이 우리와 속도를 맞추시며 말씀하셨다.

“나중에 봐라. 다른 건 다 기억 안 나도
이렇게 열심히 윗세오름에 오른 건 기억날 거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냐고, 오늘은 왜 이리 더 힘든지 모르겠다고 불평하시는 엄마에게 윗세오름 이야기를 해드리고 덧붙였다. “엄마, 아마 다른 길은 다 잊어도 이 길은 기억날 거야.” 아빠는 잠시 침묵하시더니, “으이그. 너 길 잘못 들었지 자식아.”하셨다. 시간이 좀 지나고 스페인 여행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그때 길 잃어서 많이 걸은 날, 광활하게 펼쳐진 포도밭 가운데 나무와 서있던 하얀 집이 두고두고 생각난다고 하셨다.

광활하게 펼쳐진 포도밭 가운데 나무와 서있던 하얀 집




    14일에 걸쳐 320km를 걸어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첨탑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기쁘고 벅차기보단 놀랍도록 차분했다. 앞서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을 많이 만나서 인지, 수 일에 거쳐 큰 기대를 안고 마주한 탓인지 산티아고 대성당은 감탄할 만큼 멋지지 않았다.

마침내 눈앞에 담긴 산티아고 대성당

    엄마는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게 다야? 하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산티아고에서 뭘 보려고 걷는 게 아니야 엄마” 했다. 레온부터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되짚어 보며 나는 다시 『오 자히르』를.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그 책을 떠올렸다. 책 앞장에는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시 「이타카」의 전문이 실려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 밑줄을 잔뜩 쳐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가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이타카」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오랜 여정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