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이현 Sep 11. 2020

은유, <쓰기의 말들>을 읽고 & 박완서

이기지 못한 삶, 진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무엇을 위해 가까운 존재를 밀어내며
글에 매달리려 하는가. 나는 진다.”

- 은유, 131p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박완서 선생님이 생각난다. 나는 그녀를 기꺼이, 언제라도 ‘선생님’이라 칭할 것이다. 인생의 고까운 것들을 곁눈으로조차 모두 꿰뚫고서, ‘으이그’하는 (그러나 상대에겐 들리지조차 않을) 나직한 핀잔으로 조용히 뒤돌아섰을 그녀를 존경한다.


입바른 소리 내뱉는 일은 쉽다. 그것을 참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책상에 앉아 종이에 자신의 부산물을 아름다운 창작물로 승화시켰을 그녀를 상상하며 그리워한다. 일면식도 없는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금의 나를 보면 확실히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박완서) 148p     


우리가 이미 지나온 '초년의 삶'은 지나고 나서야, 그늘에 앉아 돌아봐야만 눈에 담게 되는 광채 같은 것. 그 시간은 그렇게 지나간다.


'노년의 삶'은 삶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감지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 테두리 안에서 시간을 보내왔구나, 하고 자각하게 되는 지점. 그 벽에 등을 맞대고 남은 삶을 돌아보거나 유영한다.


그렇다면 그사이의 삶, '중년'이란 무엇일까.  치열한 부딪힘이 율동을 멈추고 빛나는 생(生)의 아름다움도 바래져 가는 시간. 중년의 삶에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가 나의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가까운 존재는 일종의 짐이자 수레바퀴 같은 것.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는 것이자, 흘러간 시간을 깨닫게 하는 이정표.


벗어나고 싶어 모두 내려놓고 나면, 사람이란 주책스럽게 뭔가 허전하다면서 다시금 손을 허우적거릴 것이다. 뭐라도 찾아서 등 뒤에 올려놓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삶이 쉬운 줄 알았느냐고, 다음 수레바퀴가 인간을 비웃으며 호기롭게 등 뒤에 올라탈 것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김영하) 184p     


아무것도 쓰지 않고, 어떤 실존적 질문도 던지지 않으며 평온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시간도 소중하다. 그러나 이내 회한에 잠기게 된다. 내 인생은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오는 인생의 무의미’. 글을 쓰는 일이 그 무의미의 환멸을 조금은 잊게 해주는 것일까. 쓰고 있으므로 해서,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스스로 자각시키고 싶은 것인가.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 밀어내며 무의미의 거센 파도 앞에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파도 위에 내 이름을 새기려 하는구나.      


나는 글쓰기가 성취가 아니라 관대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글쓰기를 즐기게 되었다.” 154p     


파도는 사라지고 저 멀리서 ‘엄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나의 글쓰기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아이들 발아래에 쌓인 먼지를 줍고, 흘린 우유 자국을 닦아내며 다시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진다. 매일 지면서 이렇게 다시 쓰는 일도 반복할 것이다. 그것이 삶에 대해, 나 자신에 관대해지는 일이라 믿으면서.      


모든 이름 없는 것들, 이기지 못한 삶.

만난 적 없는 당신들을 존경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