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 그래서 읽어봤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남자아이가 목적지도 없이 어딘가를 향해 서성이고, 걸어가며 끝도 없이 내뱉는 투덜거림, 독백들. 끝은 뭔가 다를까 싶었는데, 어느새 김새듯 끝이 나 있었다. 기승전결이랄까, 클라이막스랄까 그런 게 전혀 없는 단조로운 플롯. 첫 번째 읽었었던 소회는 그랬다.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이해하기에 역부족인가보다 하고 책을 덮었었다.
그 후로 십 년은 족히 흐른 것 같다.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었다. 하루하루가 피곤에 찌든 중년 즈음의 나이. 오랜만의 조우에 마음은 설레었지만,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아 눈두덩이에 힘을 주며 페이지를 넘겼다. 다행히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홀든 콜필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보라는 몸짓으로.
‘홀든 콜필드’ (Holden Caulfield). 소설의 작가라면 제목이나 주인공,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허투루 지었을 리 없다고 믿는 편이다. 영어는 잘 모르지만 ‘Holden’은 ‘붙잡힌’이란 뜻이고, ‘Caulfield’는 field의 영향인지 호밀밭을 떠올리게 한다. 호밀밭이 그를 붙들었는지, 그가 호밀밭을 붙들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호밀밭이 어른은 없고, 아이들만이 존재하는 순수한 공간이라면 그곳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시간에 의해 곧 사라질 공간일 테니.
자신의 종착지, 순수한 막내 동생 피비를 찾으러 가는 길에 (156p) 홀든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란 노래를 부르며, 인도와 차도 사이에 놓인 ‘연석’ 바로 옆을 걷고 있는 것을 본다. 인도도 차도도 아닌 숨겨진 경계선 같은 곳. 한쪽에선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차들이 지나가고, 다른 한쪽에선 꼬마의 부모가 꼬마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걸어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좀 괜찮아 보이고 싶을 때 쓰는 모자’를 쓰고서.
아이는 그저 계속 노래 부르며 걷고 있을 뿐이다. 홀든은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순간 기분이 더 나아졌을까. 아마도 자신과 같은 존재를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자신에게 안도하는 걸까. 인도도 차도도 모두 걷고 싶어 하지 않는 꼬마의 ‘순수한 탈선’을 홀든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봤으리라 생각한다.
이십 대 후반, 이직해서 갓 들어간 회사에서 전 직원이 삼삼오오 테이블에 둘러앉아 소규모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회의’라 쓰고 ‘잡담’이라 읽는 그런 시간. 어색하게 사람들 말소리에 부대끼고 앉아있는 틈 사이로 회사 대표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나 기분 좋아서 여기도 와봤어’라는 표정으로 해사하게 들어오는 그 양반이 점점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좌절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난감하게 밝았으리라. 이제 희극 같은 비극이 시작되리라.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적절히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속으로는 죽고 싶었지만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속으로 한숨 쉬며 옆을 돌아보다가 누군가의 눈빛과 마주쳤다.
나는 그를 또 한 명의 홀든 콜필드로 기억한다. 그는 내게서 ‘회색이 도는 진주 빛깔 모자’를 보았으리라. 눈매 아래에는 경멸이 젖어들어 있었다. 순간 당혹스러웠던 나는 잠시 후 시선을 돌렸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러나 아는가? 그 회사를 떠날 때쯤엔 나 역시 그를 홀든 콜필드의 시선으로 보았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홀든 콜필드’였다. 시차가 달랐을 뿐.
누군가를 경멸한다는 것은 살기 피곤한 일이다. 똑같은 무게의 비판을 자신에게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른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순수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지키려고 노력해봐도 뒤에서 연신 울리는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환멸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지 모른다. 끝끝내 노력한 뒤에 손에 쥐어진 것은 자신 손에 새겨진 손금뿐, 뭘 지키려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아간다. 그게 세상이니까. 결국 나는 거기에 사는 한 미물일 뿐이므로. 나라고 뭐 별 다를 것인가. 노력해도 결국 ‘오십보백보’ 아니겠는가. 과거에는 너무나 날 서 있어서 스스로를 베곤 했던 칼날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일부러 더 무뎌지도록 끝을 다듬는다. 아이들도 갖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뭉툭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
홀든 콜필드가 길모퉁이를 돌아 차도를 건널 때, 죽은 동생인 앨리를 찾으며 “날 사라지게 하지 말아줘. 앨리. 날 사라지게 만들지 마. 제발, 부탁이야.”라고 부르짖었던 순간은 (260p) 거의 공황발작이 오고 정신이 분열되기 직전의 모습 같다. 살아있는 동생인 피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멀리 떠나기로 작정했던 홀든. 그러나 사랑스러운 동생, 피비는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 둘은 아름다운 회귀의 장소, ‘회전목마’에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그렇게 삶은 다시 계속될 것이다.
지금은 조금씩 때가 묻고, 결함도 생기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홀든의 분노와 보호막을 동시에 상징하던 ‘빨간 모자’. 그걸 홀든 머리에 다시금 씌워주며, ‘집에 가서 잠이나 더 자라’던 작은 염려들이 결국 낯선 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피비’와 같이, 깊이 연결될 수 있는 끈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한 명쯤 ‘피비’가 있기를. 아늑하고 평화로운 장소로 돌아오게끔 하는 단 한사람. 그래, 단 한 사람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