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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i Kim Feb 13. 2016

#01 마담, 췰드런 이즈 임폴턴트

내 생애 부끄러웠던 순간

새벽3시, 난 어김없이 눈을 뜨고 만다. 망할 놈의 시차!

애들은 저리도 게걸스럽게 자는데, 이 나이 먹도록 시차 하나 적응 못하고 있나싶다. 촌스럽게…… 그나마 오늘은 아침 7시부터 이탈리아 남부투어가 계획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4시간만 견디면 바깥 활동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른 새벽, 나는 이탈리아 로마 <곤도라민박>에 두 딸-초4, 초6-과 같이 있다. 1월부터 한 달 반 정도 준비한 서유럽여행의 출발점에서 시차에 허덕이고 있다니…… 나도 어지간하다. 한 번에 여러 개가 안 되는 인간이다.

일찌감치 오늘 스케줄을 정리한다. 아침 7시 로마 산타마리아 맛조레 성당에서 출발 나폴리-폼페이-소렌토-포지타노-아말피 해안-살레르노-로마로 돌아오면 오늘 일정 끝이다. 그나마 전용차량을 이용할 계획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없겠다. 




폼페이를 떠난 버스는 노래 ‘돌아오라 소렌토로’로 익숙한 도시 소렌토를 지나 포지타노에 우리를 토해놓는다. 산처럼 쌓여있는 성냥갑 같은 집들과 황금색 둥근 돔 건물이 전부인 도시의 골목골목을 따라 내려간다. 빛바랜 파스텔 톤 거리를 30분 이상 내리 걸었나보다. 내리막길로만 걷다보니 무릎이 시리다. 

여긴 우기임에도 비가오지 않아 여름처럼 덥다. 내 몸은 폼페이 뜨거운 태양을 3시간 동안 고스란히 견딘다. 나이든 나는 아찔한 절벽을 발아래 두고 한 시간 이상을 구불구불 질주하는 버스에서 지쳐버렸나 보다. 바다도 싫고 내 눈은 그저 앉을 곳을 찾기 바쁘다. 겨우 카페 골목 끝 벤치를 발견한다. 바다를 등지고 계곡같이 길게 늘어진 골목은 앉아 차 마시기 좋은 곳이다.

몸이 서늘해지니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포지타노! 아름다운 해안 절벽의 도시답게 한눈에 반하게 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도시는 일러스트로 그려놓은 듯 장난감 가게 같다. 아이들은 홀리듯 벌써 까만 점이 되어 바다로 내달리고 있다. 주의를 줄 틈도 없이…… 파도를 만지러 갔나보다. 




일은 늘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사건은 배를 기다리던 그 바닷가에서 터졌다. 유럽에 도착해 ‘영어도 잘 안 되는 동양여자가 그것도 홀로, 여자 아이 둘을 데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는 말을 주술처럼 외고 다녔다. 20분…… 내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큰 딸 -초6, 이번 여행 통역 및 전자기기 담당, 평소 차분하고 모범생처럼 행동,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함- 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오자마자 바닷물에 젖은 운동화를 벗어 버린다. 양말까지 벗어젖히며 다 젖었단다.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운동화를 본 순간! 오! 마이 갓! 오늘 일정이 반이나 남았는데…… 그것도 호텔도 아닌 이탈리아 남부 바닷가에서…… 머릿속이 새까매진다. 여유로움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좀 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던 평화로움은 와장창 소리 내며 깨져버린다. 난 현실로 재빨리 돌아온다.

“조심했어야지. 이제 어떡할 거야? 신발도 하나밖에 없고, 양말은 또 어쩔 건데?

내 목소리는 이미 짜증나 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기 망정이지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다.

아이는 벤치 위로 덜커덩 올라가 양말을 털고 있다. 나름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하다. 몇 조각의 휴지를 젖은 운동화에 쑤욱 밀어 넣는다. 해결될 리 만무하다. 닦아도 닦아도 마를 기미가 없다. 짜증이 폼페이 -이탈리아 남동쪽 항구 도시,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화산 폭발로 한순간 화산재에 묻혀 사라져 버린 도시- 베수비오 화산처럼 솟아오른다. 고개를 홱~ 아이 쪽으로 돌린다. 내 감정을 한껏 실어서……

“어떡할 거냐고?”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가 있다. 나도 내 목소리 톤에 놀란다. 

아이는 좀 더 미안한 표정으로 주눅 들어 간다. ‘참아야지…… 여긴 유럽이잖아…… 진정하자’ 스스로 최면을 건다. 카페에 앉아 있는 유럽인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정면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멋진 중년 커플이 차를 마시고 있고 커진 내 목소리에 우리를 뚫어져라 본다. 

최선을 다해 운동화에 묻은 모래를 털고 마른 휴지를 또 채워 넣는다. ‘저 아인 왜 이런 상황을 만들까? 동생도 아니고 더군다나 언니가. 평소 내가 지를 얼마나 믿었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슴으로 뭔가가 울컥 올라온다. 몸을 90도로 완전히 틀어 아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다.

“생각이 있니 없니? 여기까지 와서…… 엄마 지금 힘든 거 알아 몰라?” 

아이가 놀란다.

“말리면 되지 뭐~”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자기도 자신 없나보다. 




그 때였다. 큰 그림자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그러면서도 조심스레 다가온다. 아차! 들켰구나. 두 번째에서 멈췄어야 했는데……. 커플 중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세운 무릎에 공손히 올려놓으며 차분히 말한다. 

“마담, 여기에 오는 모든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만듭니다. 당신의 딸은 양호한 편이고 남자아이들은 더욱 심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젖은 운동화가 아니라 당신의 아이가 바다를 보며 느끼는 감정입니다. 아이들은 정말 소중합니다.” 

덧붙여 “한국인입니까?” 그 소릴 듣자 정신이 번쩍 든다.

선글라스 뒤에 숨어 있는 내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지금 상황을 드라마를 보듯 보고 있었나 보다. 빨리 이곳으로 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무슨 말을 해야겠는데 정리가 안 된다. 두서없이 오만가지 생각과 단어들이 머릿속에 굴러다닌다. 드디어 입을 연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우린 내일 이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가야하기 때문에 운동화를 말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제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내용 이었던 것 같다. 그때, 큰아이는 그 남자를 향해 맑은 목소리로 “땡큐” 한다.

마치 ‘마녀의 잔소리로 부터 절 구해줘서 고마워요’ 라는 의미처럼. 그 남자도 아이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올리며 눈을 찡긋한다.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면서 둘은 이미 한통속이다.

멀리서 배가 도착했다는 가이드의 외침이 어찌나 고맙게 들리든지……. ‘휴~ 다행이다.’ 주섬주섬 큰아이에게 양말과 신발을 대충 신기고 뒤늦게 도착한 작은 아이를 데리고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난다. 부부에게 엉거주춤 인사를 건넨다. 자외선 때문인지(?) 얼굴이 오래도록 따끔거린다. 




지금도 가끔 아이들을 몰아세울 때면 가끔 그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린다. 

“Madam, children is important.” 


묵직한 남자의 음성을 흉내 내며 큰아이가 외치곤 한다.

 ‘나는 네가 지난겨울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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