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과 육아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 및 유지보수 직군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내 기억에 정부의 전자정부구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 대략 2000년대 초반에 IT 일을 시작했다. 지금의 정부 24 웹사이트, 행정안전부의 웹사이트들은 대부분 그때, 구축이 시작되었거나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금융 쪽, 대기업 쪽도 예전의 시스템에서 새로운 트렌드 및 개발 방향에 맞는 사이트로 새로운 구축을 하는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IT 개발 직군은 3D 직종 중의 하나라고 우리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근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0~20년이 지나면서 지금은 그런 문화는 거의 많이 사라진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구축을 하는 파트는 적게는 1시간에서 많게는 3~4시간까지 아직도 야근은 진행되고 있다.
업무환경이 이러니, 이 직종에는 여성들이 많은 편이 아니다. 아니 20-30 초반엔 좀 있지만, 40대가 넘어가는 지금 내 또래의 여성개발자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또한, 근무지도 대기업 사이트가 아닌 다음에는 대부분 여의도, 구로디지털단지, 상암동, 마곡, 아니면 세종시. 이런 곳에 몰려있다. 우리 집은 서울 외곽 쪽이었기에 이런 근무지는 통근시간이 꽤나 걸렸다. 나는 아침 7시 정도에 집을 나서서 정시퇴근을 하면 그나마 7~ 8시, 조금 늦어지게 되면 9~10시 정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이었기에 이혼 후, 돌봄이 필요했다. 처음엔 친정부모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친정 부모님은 연로하시기도 하고, 오히려 가족이기에 때로는 더 눈치 볼 것도 많고, 신경 쓸 게 더 많았다. 부모님은 그저 비상시에만 따뜻하게 아이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알아보니 서울에는 ‘아이 돌봄 서비스’(https://idolbom.go.kr/)라는 것이 있었다. 소득 수준에 따라 지원은 다르지만,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지자체의 심사를 받으신 어르신 선생님들이 집으로 오셔서 아이를 잘 돌보아 주고, 식사를 챙겨주신다. 그 집의 엄마와 아이와 돌봄 선생님이 모두 잘 맞으려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을 수는 있지만, 그런 기간을 지나고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몇 년 동안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아이 돌봄 서비스를 이용했고, 또 초등 저학년일 때에도 학원을 보냈다. 너무 어릴 때는 공부방부터 여러 예체능 학원을 보냈다. 물론, 배움에의 욕심도 있었고, 돌봄 선생님이 하루종일 계실 수는 없었기에 사교육을 어쩔 수 없이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간다. 가끔은 이게 맞나 싶었지만, 풀타임, 심지어 오버타임 근무까지 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하루종일 시스템 속에 넣어놓는다 치더라도 나는 일을 잘 골라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직장이라는 한 곳에만 충성을 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직장의 선택과 직장 업무에 요령이 필요했다. 나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되도록 이 분야에 살아남아있으면서 업무 강도가 세지 않은 일을 찾으려 눈을 번뜩이던 시간들. 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직군이라는 일의 특성상 매번 강도 약한 업무를 하기란 불가능이었다. 간신히 일에 좀 적응이 되려나 싶으면 편도 1시간 30분 이상의 먼 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생기거나, 가깝다고 좋아해 보면 업무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야근은 늘어날 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멀던지, 일의 강도가 세던지 둘 중 하나만 걸린 걸 감사했어야 하나, 먼 것도 모자라 허구한 날 야근인 프로젝트를 맡아하던 시절엔 숨만 쉬어도 한숨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아무리 돌봄 선생님이 오신다 해도 밤늦게는 아이는 엄마를 더 찾았고, 회식도 종종 있는 일이어서 그럴 때마다, 왠지 나는 내가 너무 나쁜 엄마인 것 같았다. 아이와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의 부담은 늘 그렇게 있었다.
또한, 욕심이 많은 엄마이기도 했던 나는 평일은 그렇게 지낸다 해도 주말에는 아이가 경험하면 좋을 것 같은 체험이나 여행 등을 다닌다고 부끄럽지만 집안은 대체로 엉망이었다. 남들은 내가 살림을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도 아이와의 경험도 나는 그 무엇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버는 만큼 쓰기도 했지만,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오면 녹초가 되어 일요일 저녁쯤에는 집안을 정돈하고 치워놔야 하는데, 혼자서 하기엔 점점 힘들어져 갔던 것 같다.
- 서울 노원구 중계동 학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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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아이가 고학년이 되었고, 이제는 좀 일 좀 하나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또 보여주긴 했다. 좋아진 줄 알았는데, 고학년이 되어갈수록 자아가 생기는 아이 때문에, 뒤늦게까지도 계속 엄마를 찾는 아이 때문에, 나는 내 아이는 왜 아직도 이럴까 하는 가져서는 안 될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 인한 죄책감, 또 엄마의 부재로 예민해져 있는 아이. 잘해온 것 같았는데, 여기저기서 구멍이 숭숭 뚫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우울증으로까지 번져갔다.
하지만, 지난 6년간 아이와 내 일을 나름 열심히 지켜왔다고 생각한다. 우울감이 와서 약을 먹기도 했고, 아이도 예민한 성향이 되어서 센터에 가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6년간 다른 분야로 빠지지 않고, 내 분야에서 나의 커리어를 지켜왔고, 아이도 조금만 더 아껴주고 사랑해 주면 예쁜 청소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3년만, 3년만 더 버티자.
육아와 일은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일과 육아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이혼 후, 혼자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게 힘들지 않을 수는 없던 것이다. 그래도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있잖아.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아이의 엄마고, 아이가 기대고 힘낼 곳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끝까지 일을 잘 해내고야 말 거야. 나를 응원하고 나를 응원하는 것이 곧, 아이와 나 우리를 응원하는 길이므로 일과 육아 둘 다 잘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