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경필대회 (글씨 아름답게 쓰기 대회)에서 상도 탔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예쁘게 글씨를 쓰는 것이 싫어졌습니다. 사춘기 때에는 글 쓰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한동안 손글씨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논술 시험을 보려니 원고지에 조심스럽게 답안을 써야 했습니다. 수정테이프도 사용할 수 없고 볼펜으로 써야 하는데, 중간에 필기구가 바뀌면 부정처리가 된다기에 똑같은 굵기와 잉크의 펜을 두 자루 준비했습니다. 2교시를 치던 중 볼펜이 갑자기 안 나와서 3교시에는 여분의 볼펜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 훈련으로 무사히 2025학년도 리트 시험을 마쳤습니다. 언어영역 시험을 하루종일 변주하며 이어 치는 느낌이랄까요. 응시료 25만 원에 쌈밥도시락 패키지가 포함돼 좋았습니다. 아직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남았기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말은 팔게 하지만 글은 사게 한다.
말 (speaking)과 글 (writing)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성질이 사뭇 다릅니다. 물론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선행되어야 하고 '글쓰기'보다는 '읽기'가 우선입니다. 인풋 (input)이 없는 아웃풋 (output)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지요. 상대방의 말은 잘 듣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궤변만 늘어놓으면 민폐입니다. 올해 여름휴가에서는 책을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내가 닮고 싶은 작가님들의 글을 찾아서 여러 번 읽어보렵니다. 나태주, 정호승 시인의 시집도 좋고 이민진, 한강 작가의 소설도 좋을듯합니다. 작년 이맘때에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시나리오에 온전히 빠져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중년의 경감 '해준'에게 스며들었고 '서래'의 어눌한 돌직구를 보면 제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재하는 인물과 싱크로율이 높아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당신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다시 일본어를 시작하고 로스쿨에도 도전하게 되었으니까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카카오 비즈니스 세미나를 신청했습니다. 우리말 역순사전 (Reverse Korean Dictionary)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서 유익했습니다. '글밥'이라는 단어도 상당 귀여웠고요 단어를 쓰는 데 있어 성인지감수성에 유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남기자', '남의사', '남경'은 어색한데 '여기자', '여의사', '여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니 참 부끄럽습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AI에게도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A4 한 장이 누구에게는 낙서를 하는 아무것도 아닌 이면지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운명을 결정짓는 무겁고 날카로운 법률의견서일 수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돈이 되는 글로 '글밥'을 먹을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