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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Eun Mar 02. 2016

The Flight_10

<10> 고백 그리고 선택

<10>



 타이페이에서 각자 자리로 돌아간 우리는 매일 매일 통화를 했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페북 메신저에 카카오톡의 보이스톡같은 통화 기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한 시간씩 통화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보고 싶다 고백했다.


 그도 목감기 때문에 병원을 다녀왔다 했고, 나 역시 좀처럼 낫지 않는 감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통화 하는 그 시간만큼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에 목이 아픈 고통 따위는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벤쿠버로 돌아가면 이전과는 매우 다를 거라고 했었다. 이전에 했던 여행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와는 분명히 완전히 다른 느낌일 꺼라고. 그리고 역시나 그랬다. 돌아가서의 우리는 현실도 여행지도 아닌 중간 즈음 어딘가에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뀌어 있는 서로의 시차가 안타까웠지만, 나는 그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달랐다. 장거리 연애를 몇 번이나 해 본 그는 이미 장거리 연애에 지쳐있었다. 마지막으로 장거리 연애를 끝낼 때, 다시는 롱디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면서 그런데도 이러고 있어 자신도 혼란스럽고 힘들다 했다. 우리는 둘 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그리고 우리가 조금 더 어렸다면, 그는 아마 서울로, 나는 아마 벤쿠버로 서로를 보러 갔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기에는 포기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렇게 아름답게 무모할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 먼저 큰 호감을 보였던 게 그였다면, 이제와서는 오히려 내 쪽의 마음이 더 큰 것만 같았다. 우리는 매일같이 함께 고민했다. 서로가 뭘 원하는지,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는지. 둘 다 자신있지도, 그렇다고 모든 걸 끝내버릴 용기도 없었다.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닌, 서울과 벤쿠버였기에 아무 것도 아닌 양 그대로 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둘 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다. 그는 나에게 뭘 원하냐고 묻곤 했고, 나는 그에게 같은 질문을 또 반문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답 같은 건 몰랐다. 항상 내일 다시 얘기해보자라고 하루 하루 결정을 미뤘고, 하지만 그와의 통화는 매일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와 친구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친구로 지내며 그가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누구의 남자친구가 되는 지 따위는 더더욱 알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로 남아도 상관없다고 하던 그도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와 같은 생각이라 했다.  


 나는 내 스스로 사랑꾼이라 칭할 만큼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벤쿠버로 와서 무엇이든 함께 하자고,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면 나는 많은 걸 포기하더라도 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나보다 7살이 많았던 그는,


"I might be too old"

아마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나봐..


라는 변명 아래 앉아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포기하라 하지 않았고, 그 역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그의 그런 태도를 비난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감쌌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은 특히 그를 더 비난했다. 진짜 좋아하면, 한국에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나에게 벤쿠버로 와달라고 설득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내 친구들이 너에게 너무 많이 빠지지 말라고, 그러다가 더 상처 받게 될 지도 모른다고,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될수록, 그리고 이렇게 애매모호한 상황이 계속되면 될수록 더더욱 힘들 거라고 얘기해준다고 하자 그는 그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들이 너에게 좋은 친구들인 것 같다는 예상외의 대답을 했다. 나는 그런 것 같냐고, 너도 그렇게 우리 중 누가 상처를 받게 될 거 같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 둘 중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둘 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해결책 따위의 이야기를 메신저로 주고받기 시작했다.


Well, the way I see it there are 4 options

음.. 우리한테는 4가지 정도의 선택지가 있는 거 같아..


Ok, Let me know.

그래,, 말해봐봐..


-Be a couple

커플이 되는 거

-not be a couple and not talk

커플이 되지 않고, 서로 이야기도 하지 않는 거

-play it by ear and see what happens

그냥 어떻게 되는 지 두고 보는 거

-just be friends

그냥 친구가 되는 거

Any other options?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Well.. that's enouph.. so,, what's your answer? you know already?

음.. 아니 이거면 충분해.. 그래서.. 니 대답은 뭔데? 뭔지 이미 알고 있어?


I have no idea.

아니. 모르겠어.


역시나 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Hey.. I think you are a special woman, really. I wasn't expecting to meet you or have anything happen. That's why this is all crazy.

있잖아. 나는 니가 정말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해. 난 널 만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 상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했었는데.. 그래서 이 모든 게 당황스러운거야..


Right..

그래..


I mean, I just got out of a long relationship, and I wasn't looking for another one right away.

그니까 나는.. 난 오랫동안 연애하다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래서 당장 누구를 만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그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지면서 혹시 오해가 될 수도 있어 전화를 한 참이었다. 또 다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다시 전화를 끊었고, 이러고도 10일쯤 더 고민했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통화를 했다.


 그 중간에 나는 영화 비포 시리즈를 다운 받아 보게 됐다. 갑자기 여행지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났고, 비포 선라이즈부터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까지 세 편을 다 찾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비포 선라이즈의 대사 중에는 나와 폴이 대만에서 했던 대화들과 겹치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 비록 영화였지만 계속해서 궁금했다. 결국 비포 미드나잇에서 현실이 된 그들을 보면서, 애틋하고 말랑말랑하지는 않지만 단단하고 진짜가 된 그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이내 시작도 하지 않은 우리 관계에 이를 접목하거나 비슷하게 생각해 반추해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렇게 통화를 이어가던 어느 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시작하지 않기로.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지만, 만약 우리가 처음 커피를 마셨던 그 날로 돌아간다면 함께 커피숍에 가지 않을거라 말했다. 그는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했다. 나는 친구로 남지 않겠다고, 연락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는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겠다고 했고 그는 다 기억하겠다고 했다. 이 쪽도 그 쪽도 눈물이 흘렀고, 이렇게 울면서 끝낼 거면서 왜 우리는 시작하지도 않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가 한참의 고민과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을, 다시 처음으로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었다. 그리고 우리가 타이페이에서 헤어져 공항으로 각자 갔었던 그 날, 그 역시 울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나 혼자만 그 이별이 아팠던 게 아니구나하는 마음에. 그렇게 나는 마음에도 없는, 그와의 모든 걸 잊겠다는 이야기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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