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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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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20. 2019

미래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일기

4월은 좀 바쁜 달이었다. 4월만 끝나면 끝내주게 놀아제낄 것이라 다짐하며 4월을 보냈다. 5월의 첫 주말에 휴가를 떠났다. 어버이날까지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남해로 여행을 갔다. 동생은 학교 시험 때문에 오지 못했지만 셋이서 즐거운 일박이일을 보냈다. 남해는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바다색이 정말 예뻤다. 숙소였던 펜션은 베란다 바로 앞에 남해바다가 출렁이는 곳이었다. 해 질 녘 바닷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장면은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캄캄해지고 나서도 조용한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나머지 날들은 본가에서 보냈다. 부모님 집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같고 언제나 편하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어쩐지 좀 슬프다. 다시 이 도시에 돌아오는 나를 생각해본다.


남해바다의 해질녘


주말에는 홍콩에 다녀왔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비행기에 올라타서 월요일 새벽에 한국에 도착해 바로 출근하는 아주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렇지만 약간의 잠을 포기한 덕택에 이틀을 꽉 채워 홍콩을 즐길 수 있었다. 홍콩은 내가 혼자서 처음 떠났던 여행지이다. 더 이상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이서 가니 훨씬 많은 것들이 보였다. 갔던 장소도 새로웠고 뭐든 용기가 났다. 빅토리아피크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었는데, 내가 집합장소를 착각해서 엉뚱한 곳에 도착했다. 집합시간의 고작 15분 전이었고, 우린 이미 그 장소로 가기 위해 엄청나게 오래 걸었기 때문에 완전히 지쳐있던 때였다. 우버를 부르고 택시를 잡아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약간 다 놓아버리고 싶었다. 망했어. 이번 여행은 완전히 망했어.


15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아니, 그 시간조차 재깍재깍 흘러서 13분 정도 남아있었다. 달리자.


센트럴에서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주말이었기에 인파로 북적여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 사이를 전력 질주했다. 예전이었으면 조금 달리다가 포기했겠지만, 나는 최근 마라톤을 하겠다며 운동장을 달려왔기에 달리기에 조금 자신감이 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딱 그 시간에 집합장소에 도착했다.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내고 포기했을 것 같다. 아무래도.


호텔 라운지의 야경. 눈부시게 예뻤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5월에 일정을 가득 잡아놓아 버려서 여행에서 돌아와서 하루도 쉬지 못했다. 달리기도 하루도 못 가고 헬스장도 못 갔다. 중국어 수업을 하는 곳까지 갈 힘도 없어서 아침에 '타다'를 불렀고, 수업시간에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새로운 일주일이 밝았다. 일상을 잃어버려서일까, 이유모를 끝없는 무기력에 깔려버린 느낌이다. 분명 4월까지만 해도 의욕이 넘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원하는걸 다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런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나의 몫이겠지. 어느 상황에 닥쳐도 내 기분만큼은 잘 다스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쉽지 않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또 시간이 흐르고 초여름의 푸르름이 한여름의 그것으로 바뀔 무렵 다시 힘을 내서 뭔가 하고 있을 거라고 미래의 나에게 이 일기를 보낸다. 매일을 채워왔던 일상을 하나하나 되찾으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이번 주말엔 나의 첫 마라톤이 예정되어있다. 모쪼록 힘을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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