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 가는 나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요즘. 또다시 야심 차게 집을 정리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작년엔 결혼 전에 입었던 옷들을 한차례 보냈다.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처럼 마냥 바라만 보며 종종 과거를 회상하던 그 10년 전의 옷들을 기부하는 곳으로 많이도 보냈다. 정리 전문가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옷들이 그렇게 많은지 꺼내보고서야 알았다. 차 트렁크에 꽉 찬 옷들. 자신들을 원하는 좋은 주인들을 만나길 바라며 보내주었다. 두 아이들의 옷장에 가득 차지하고 있었던 나의 옛 날개들이 비워지자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책이다. 나에게 책은 옷보다 정리하기가 더 어렵다. 책을 무척 좋아라 하지만 어느 날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을 읽다가 나의 지적 허영심을 달래기 위해서 그동안 내가 책들을 사고 모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보면 마음속에 더 달달하게 와 닿아 간직하고픈 책들도 있었고 나중에라도 혹시 필요할까 봐 가지고만 있는 책들도 수두룩했다. 이제는 분명 헤어져야 할 책들도 있음을 알았지만 바쁜 일상이라는 변명으로 책 정리는 회피하고 있었던 듯하다.
에니어그램
책장의 책들을 모두 끄집어내고 선반에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닦아본다. 노란 표지의 얇은 책 '에니어그램- 당신 자신과 남들을 아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 이상 구전으로 이어져 온 동양의 인격 유형론인 에니어그램을 바탕으로 필리핀의 한 수녀님이 7,500명의 참가자들과의 워크숍과 피정의 결과물을 정리한 책이다. 사람들의 성향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눈 자신과 남들을 파악해보는 도구, 에니어그램. 이 책에는 에니어그램에 대한 소개, 각 유형에 대한 설명, 어떻게 나 자신이 건강한 자아상 유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게 나와있다. 20년 전 학부를 다닐 때 들었던 인간학 수업에서 수녀님께서 에니어그램을 소개해주셨던 희미한 기억이 났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에니어그램 테스트를 해본다. 나는 신실하고 충성스럽고 온유하나 의심과 걱정이 많은 6. 충실가형.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큰 2. 조력형과 중심 잡히고 안정된 그러나 나태해질 수 있는 9. 중재자형도 비등한 점수로 나왔다.
MBTI
예전에 고등학생 때 했었던 MBTI도 생각이 났다. 그때 내 결과는 청렴결백한 논리주의자 ISTJ형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고 융통성도 없었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나. 40대가 된 지금의 나는 어떨까 하며 내친김에 MBTI도 해본다. 두 번을 해보았다. 나는 선의의 옹호자 INFJ 형. 이상적이고 신념으로 가득 찬 그러나 자기희생으로 쉽게 번 아웃되는 유형.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는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찾았을까?
에니어그램과 MBTI의 결과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이 두 가지 도구 모두 설문으로 측정하기에 결과에 있어 나 스스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바람으로 의도적으로 문항에 대한 척도를 선택할 수 있어 결과가 주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결과를 어느 정도 의도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럼 다른 비교 도구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질문지에 답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다른 도구. 사주팔자. 내가 태어난 날과 시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 내 사주팔자의 풀이까지도 에니어그램과 MBTI의 결과와 비슷하다면 어느 정도 나에 대한 기질, 성향의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주팔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턴 생활을 하면서 만난 분께서 고맙게도 나의 사주팔자를 풀이해서 출력해 준 문서가 있어 다시 펼쳐보았다. 에니어그램과 MBTI의 결과와 비슷한 내용들이 꽤 많았다. 봉사활동,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좋으며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머리에 있는 생각들을 실천함에 있어 다소 아쉬울 수 있고 의존하려고 하는 성향 때문에 자기 주도적으로 헤쳐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풀이였다. 그리고 우리의 운명에 있어 정해진 것이 7이라면 나 스스로의 하기 여하에 따라 3이라는 큰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다시 봐도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발상이다.
나와 남을 알아가는 도구로서의 학문들과 방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에니어그램, MBTI, 사주팔자를 살펴보았다. 며칠간 이러한 도구들로 알아본 나와 내가 스스로 느끼는 내 모습들을 비교해보면서 나름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내 성격, 인성, 기질, 성향 등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그 기본 바탕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두 아이들만 봐도 태동도 달랐다. 큰 아이는 평소에는 꿈쩍도 않고 똘똘 뭉쳐 있다가 내가 편안히 옆으로 누우면 그때부터 보글보글 거품 내며 헤엄치고 돌고 달리고 아주 힘차게 움직였다. 둘째 아이는 내가 앉으나 서나 누워있으나 천천히 꾸준히 움직였다. 태어났을 때 큰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자기 여기 나왔다고 크게도 울었고 둘째 아이는 입안에서 웅얼거리며 조용히 울었다. 신기했다. 지금도 두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다르다. 재밌다.
우리는 태어날 때 나라는 기본 바탕에 밑그림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나의 가족, 환경, 경험 등이라는 여러 가지 색상의 물감과 다양한 재질의 재료들로 점도 찍어지고 선도 그어지고 칠해지고 덧붙여져 가며 여러 가지 기법으로 평면에서 입체적으로 나라는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간다. 처음엔 부모의 손길로 매만져질 수 있겠지만 점점 용기를 내어 내가 붓을 잡고 내 손으로 나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중요한 건, 나에게 집중하고,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때 편안한지를 알고자 하는 노력과 어느 정도 타고난 내 모든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인정하면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 내가 왜 이럴까 하는 모습은 그냥 내 모습. 이상한 것도 아니고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모습. 상황에 따라 소위 말하는 나의 장점은 단점이 되고 단점은 장점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에. 여러 도구들의 도움을 받아보기도 하고 나 스스로 내 모습을 돌아보며 그 모습 그대로 긍정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지칠 땐 쉬고 그 자리에서 머물르며 숨 고르기를 하고. 어제보다 나아지지 못하더라도, 멀리 돌아가더라도, 나선형을 그리며 소용돌이치더라도, 결국엔 우린 숨 쉬는 한 계속 나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