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구름달팽이 글쓰기
TV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유독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노래 경연대회이다.
'나는 가수다, 싱어게인, K팝스타, 슈퍼스타 K'를 비롯 트롯경연도 한동안 봤다. 가수가 잘 부르는 노래를 듣기보다 심사위원의 품평이 더해진 프로그램을 선호했다.
어릴 적 악기를 배워 본 적도 없는 나. 부모님도 음악적 재능 따윈 없었다. 빈곤한 음악 DNA는 교대시절 꼭 이수해야 하는 피아노 수업에서 결국 애국가를 잘 못 치고 C를 맞고 졸업했다. 손가락만 실없이 길었지 악보를 보는 눈이나 건반을 위아래, 옆으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손놀림은 나에게는 풀기 힘든 수열 같았다.
음악에 둔재라고 자처하게 된 나는 나는 무명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감히 평가를 해본다. 내가 느낀 것과 심사위원의 생각이 같은지 비교해 보며 나의 음악성에 대해 한 줌 기대를 걸어보곤 했었다.
'음악은 들을 줄 아네.'
악기도 못 다루고 노래도 못해도 '음악적 감수성'이라도 챙기고 싶은 같잖은 희망 때문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은 잘 부르는 가수와 마음을 움직이는 가수로 나누어 말하는 것 같았다.
목젖이 보이고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의 열창에도 점수는 박했다. 음정, 박자, 고음, 성량, 태도 모든 것이 우수해도 최고점은 아니었다.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은 음색이 특이했다. 독특한 음색에 가사가 얹히면 그의 성대를 뚫고 나온 음표들은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와 오래오래 머물렀다. 고막으로 젖어든 노랫말은 눈시울까지 붉게 하거나 한동안 심장도 멈출 만큼 흥건히 적셨다. 게다가 잘하려 포장하지 않으니 힘이 쫙 빠져있어 보는 우리도 편안했다.
힘을 최대한 빼고 읊조리듯, 그래서 숨소리마저 나직한 노래가 되었을 때는, 돋아난 소름처럼 같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고, 발라드 가사가 절정에 달할 때 자신의 고달팠던 인생을 쏟아내는 듯한 포효에 같이 울었다. 하지만 너무 과장된 감정은 오히려 점수를 잃었다. 본인이 감정에 절어 완급을 조절 못하는 건 용서가 안되었다.
즐겁고 신나는 곡에서는 리듬에 올라타 음악을 즐기는 가수의 진정성에 열광했다.
심사위원들은 노래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몸을 움직이게 한 사람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 나도 그랬다. 그나마 음악적 감수성은 조금 있었나 보다.
사람들은 노래를 통해 웃음을 얻기 바랐고 아픈 상처를 위로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경연프로그램은 장수했다.
지난 수업에서 '좋은 글'과 '잘 쓴 글'에 대해 작가님이 물으셨다.
"잘 쓴 글은 보기에 좋은 글이고 좋은 글은 마음에 남는 글이에요."
노래에 비유해 대답했지만 그동안 나도 그 사실을 잊고 끙끙대고 있었다.
글도 노래와 마찬가지인 것을.
잘 쓰려하다 보니 힘이 들어가고, 어딘가에서 읽은 좋은 구절을 붙여 명작을 만들어보고 싶어 했다. 머리로 글을 쓰니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위로받고 싶은, 웃음을 선사받고 싶은, 삶의 의미를 채워 다시 일어서고 싶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했다.
'잘 쓰려는 욕심이 그동안 마음을 꽁꽁 묶어놨구나.'
뿌연 안갯속에서 헤매던 내게, 희미하게 길이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