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헤르메스 상(像/형상 상)이 돌 안에 있다"와 "반선(半線/하프 라인/반으로 나누어 한가운데에 그은 선)은 선線 안에 있다" : 헤르메스 조각상이 현실적으로 돌 안에 새겨져 있을 때뿐만 아니라 돌을 쪼아 헤르메스 조각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때도 "헤르메스 상이 돌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진술은 "헤르메스 상이 현실적으로 돌 안에 있다"는 뜻으로도, "헤르메스 상이 돌 안에 가능적으로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반선은 선 안에 있다"라는 경우도 비슷하다. 이로부터 '~이다' 혹은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on energeiai)'과 '가능적으로 있는 것(on dynamei)'으로 나뉠 수 있다.
___
우연적이거나 참 혹은 거짓은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에서 배제된다. 그것은 우연은 어떤 확정된 원인이 없기 때문이고, 참과 거짓은 인간의 사고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 그 결과 그 자체로서 있는 것과 가능태 혹은 현실태라는 뜻에서 있는 것만이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의 두 영역으로 남는다"
무엇인가? 그렇다면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는 어떤 하나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추적한 단서들을 묶고 있는 '최종적인 어떤 하나'이다.
이러한 추적방식은 "헤르메스 상(像/형상 상)이 돌 안에 있다"와 유비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보인다. 이것은 곧 창의와 연관되며, 가능태를 보는 것은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나며 혹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창의적 사유는 순간에서 발생하여 현실태가 되기도 하며, 시간 안에서 변양을 거치며 현실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반선(半線/하프 라인/반으로 나누어 한가운데에 그은 선)은 선線 안에 있다"는 과학적 사유를 촉발할 수도 있다. 예컨대 짚풀이 수북하게 쌓인 헛간 안에서 송곳을 잃어버렸다면, 반선이 선 안에 있듯이, 송곳은 헛간 안에 있다. 송곳을 찾는 방식은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송곳은 헛간을 넘어서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어떤 한정된 상태가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탐구 방식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럴 때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닫힌계 설정은 범주들을 특정하면서 결정된다고 보인다. 그 범주들이 가리키는 것 그 하나가 바로 실체이니까 말이다. 또는 그 역일 수도 있다. 범주들 특정은 귀납형태에서 연역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범주를 특정하여 하나를 찾는 그 방식 자체는 연역이다. 귀납과 연역은 혼재되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이 실체론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내 미나리꽝도 처음에는 흙무더기였다
미나리꽝을 만들려고 했을 때, 그때 어떤 환상 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 느낌은 몹시도 유쾌한 것이었고 무결한 것이었다(나는 그때 완전성의 체험을 한 것이다). 그것은 가능태 같은 것이다. 흙무더기는 많은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그 흙무더기는 하나의 미나리꽝이라는 현실태로 드러났다. 내 미나리꽝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가능태로 존재하였고 현실태로 드러나서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존재이며, 미나리꽝의 실체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