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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n 06. 2024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내생각/ 직관에 대하여

* 형이상학 본문 1권 1장 p35:20줄~36:02줄 / 책 표기와 상관없이 글 줄을 그대로 세어서 스무 번째 줄부터 다음 장 두 번째 줄 까지를 의미함. 그리고 그 문장들과 그에 표기된 주석을 하나의 글로 묶었다. 아래 네모 칸 안에 있는 글.


‘기술’이나 ‘학문적 인식’을 비롯해서 그와 같은 부류의 다른 것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윤리학’ 저술에서 이미 논의한 바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기술이나 학문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사유의 탁월성’으로 분류(aretē dianoētikē/아레떼 디아노에티케/라)되는 것들에는, 실천적 지혜(phronēsis/프르네시스), 지혜(sophia/소피아), 지성(nous/누스) 등이 있다. 지금 우리 설명의 지향점은 다음과 같다. ‘지혜’라고 불리는 것은 ‘첫째 원인들과 원리들’에 관한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위의 글을 <12p37 주석 24>와 연계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1) 순수학문의 ‘이론적 활동’/ theōria/띠오리아 *띠오리아는 ‘관조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지만, 책에서는 ‘이론적 고찰’ 및 ‘이론’으로 옮겼다고 함.

2) 정치적 행동을 비롯한 ‘실천적 활동’/ praxis/프락시스 *영/연습,실습,응용,실행,실지, (이론지식에 대한)실천,활동

3)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제작활동’/ poiēsis/포이에시스 *시는 제작활동에 들어간다. 글쓰기도 제작이다. 즉 만드는 것이다.



*내생각/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학문의 이론적 활동 즉 ‘지혜’를  제1원인으로 본 듯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작활동을 지혜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지혜의 기준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이 고착화되었다. 그때부터 시와 음악의 지위는 철학의 시녀가 되었고, 철학은 다시 신학의 시녀의 지위에 머물렀다. 다시 고대 그리스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니체는 바로 그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니체가 본 재 1 원인은 ‘음악’이었다. 그리고 ‘시’였다.


내가 보기에는, 저 너머의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음악적인 감정이 먼저고, 거기서 시(노래)가 나오고, 그다음 학문적인 형태, 즉 직관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것은 약간 서로 다르다. 예술적 환희감과 직관은 다소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지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한다.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

     

이것이 하나로 합쳐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예술적 환희감은 어떤 시간의 변화에서 오는 경험과 경험의 만남에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오는 것이고, 또한 질료에서 형상으로 드러날 때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손으로 하고 있을 때, 뭔가를 행하여 그 변화가 드러날 때 찾아온다.    

  

직관은 가만히 있을 때 더 활발하다. 차를 우리거나, 산책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멍 때리고 있거나 할 때에 직관은 활발하다. 마치 어떤 가느다란 것이 어딘가에 깊숙하게 침투하여 무엇인가를 꺼내오는 느낌이다. 그건 접속 상태이다. 그 접속 상태에서 어떤 문장들이 머릿속에 막 지나가는 것이다. 그럼 그걸 받아 적으면, 그건 모두 거의 자연의 말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범주화를 이루면서 순식간에 연결된다. 그리고 이내 섬광처럼 전율을 일으킨다. 그때의 머릿속은 정지된 것처럼 가만히 있다. 몰입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일상의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별로 생각 안 한다. 그렇기에 그건 분명 내 지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저 너머에서 퍼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칸트도 쇼펜하우어도 니체도 모두 그 방법을 썼을 것이다. 그런 접속 상태에서는 기분이 붕 뜬 것 같을 때도 있다. 나는 이 글을 그런 나의 상태들을 떠올리며 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직관으로 건져 올린 메모들이 정말 많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활용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글을 써 보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쓴 글들은 호흡이 일사천리다. 물론 그런 글들을 수정할 때는 거의 직관에 접속하여 집중하면서 수정하기도 한다. 맥락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직관은 자기 의지가 아니지만, 이러한 직관적 상태로 들어가는 일, 즉 직관을 활용하는 것은 반복적 훈련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는 순간적으로 깊이, 날카롭게 쑥 미끄러지듯이 들어가는 것이며, 일종의 자기 안으로의 자맥질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자기 시간 확보가 먼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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