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름 Apr 19. 2016

아무도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부모님께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물론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아마 좋지 않은 형편에 큰 도움을 주실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크셨을 거다. 하지만 이미 가기로 결정을 한 나는 여름 방학이 끝난 후 교수님께 인턴으로 일본에 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은 계속 반대를 하셨지만 나는 계속 고집을 부리며 인턴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먼저 교수님께 상담을 하니 학교에서 연계되어 있는 곳이 있다며 소개를 해주셨다. 그리고 다행히 가을부터는 그곳에서 인턴 면접을 위한 준비를 했다.

부모님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50만 원만 준비해 주세요.


라고.

인턴 면접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이미 기본적인 일본어는 혼자 힘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이든가, 일을 하게 되면 사용하게 될 경어라든가 여러 가지를 배웠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일본어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듯, 한국어로 생각을 정리하고 일본어로 번역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고 실제로 일본에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도 많았다.



무사히 3개월 동안의 준비 끝에 3차 면접까지 무사히 통과했고 인턴에 합격했다.

나는 스키장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12월 23일.

모두가 인턴 회사를 통해 오픈티켓으로 비행기 예약을 했다. 하지만 나는 왕복 티켓을 살 돈이 없었다.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돈 몇 만 원 차이로 편도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모두가 좋은 캐리어를 살 때 나는 가장 저렴한 이민 가방을 샀다. 공항에 모였을 때 모두가 가져온 짐을 보며 나는 또 초라함을 느꼈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이미 부모님은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낼 생각에 울고 계셨다.

나를 위해 지금까지 고생과 희생만을 해 온 부모님께 내 욕심 하나만 들고 떠나는 사실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도 가방 때문에 초라함을 느낀 나의 철없음이 정말 죄송스러웠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사실은 정말 두려웠다.

돈 50만 원 들고 외국에 간다는 것이.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기숙사가 제공이 되고 기숙사비는 한 달 후 월급에서 차감되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큼은

크나큰 안도가 되었다.



인턴에 가기로 결심했던 순간부터 난 꼭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일본어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평생 이 길을 가야겠다고.



스스로 성장해나가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아마 나는 더 깊은 절망으로 떨어질 거라는 걸 알았다.

두려움과 불안감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울고 있는 부모님의 뒷모습은 보지 않았다.




도쿄에 도착을 했다.

날씨가 한국과 달리 굉장히 따뜻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생경하고 낯선 풍경들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꿈에서만 그리던 현실 속에 내가 있었다. 처음 느끼는 설렘에 나는 들뜨고 설레었다.


그리고 짐을 풀고 같이 온 동기와 함께 신주쿠로 향했다.

도쿄 도청에 가려고 지나가는 일본인을 붙잡고 자신 있게 물었다.


「すみません。東京都庁はどこですか?(죄송한데 도쿄도청이 어디예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え? どこですか?(네? 어디요?)」였다.


상대는 나의 이 간단한 일본어조차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발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몇 명에게 물었지만 모두 나의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계속해서 그들은 나에게 반문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하는 일본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 난 이미 jlpt(일본어 능력시험) 2급을 합격한 상태였다. (1급이 가장 높은 레벨)

열심히 준비한 지금까지의 날들이 수포로 돌아갔고 자신감은 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때부터는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점점 더 일본어를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신주쿠에 가서 환전한 50만 원을 지갑에 넣어왔지만 혹시라도 나중 일이 두려워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

일본어 하나만 믿고 간 일본.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내가 넘기엔 현실이 너무나 가까웠고 높았고 단단했다.



그렇게 3일을 보내고 인턴으로 일하게 된 니가타로 향했다. 창 밖의 풍경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게 변했다.

도쿄에서 몇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朴さん。 ここで降りて下さい(여기에서 내리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니가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처절하게 거리를 두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