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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 May 11. 2016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웃었다.



그렇게 도쿄에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니이가타(新潟)

그리고 같이 가게 된 한 살 어린 여자 후배.

서로 인사만 몇 번 나눈 적 있었던 사이.

우리 사이엔 어색한 공기만이 흘렀고, 마중을 나온 관리자와 의무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기숙사로 안내를 받았다.


왼쪽엔 싱글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오른쪽엔 이층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창문 앞엔 난로가 있었다.

난로 때문인지 석유 냄새가 났다.

처음 본 낯선 광경들과 공기가 나를 더욱 굳게 만들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初めまして、朴ダルムで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처음 뵙겠습니다. 박다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처음 본 낯선 외국인 여자 아이들.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조금은 낯설어했다.


그리고 관계자분께 들어보니 기숙사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한국 언니 두 명이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쉬고 있는데 방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여니 언니들이 서 있었다.

"우리 지금부터 사람들이랑 술 마실껀데 올래?"

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도 인간 관계에 서툴렀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외국이라는 불안감은 나를 그 자리에 가게 만들었다.

언니들이 알려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국 언니들과 일본 남자 아이 두 명과, 일본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이미 모인 그들은 그 자리가 익숙한 듯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서툰 부분이 많은 사람들 속에 익숙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자리가 너무나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일본어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져서 쉽사리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언니들은 탐탁치 않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영부영 인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국제 전화비가 부담되어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인터넷도 기숙사엔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더욱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는 그 고독함을 이겨내기 위해 기숙사에선 알아 듣지도 못하는 일본 방송을 틀어대고 일을 하러 가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다 인사를 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간 관계를 한동안 포기했던 나였지만, 새로운 환경이라는 것은 나를 조금씩 변화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일본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두의 걱정을 안고 일본에 온 만큼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의지도 한 몫했다.

그리고 바꾸고싶었다. 어둡고 우울하고 실패라고 여겼던 약 2년 반의 시간을.


아침에 일어나 항상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힘내자! 라고.

그리고 나의 하루는 언제나 인사로 시작됐다.

마주치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하루에 열 번을 마주치면 열 번 모두 다


お疲れです!(수고 많으십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적었기 때문에 긴장도 됐지만 그래서 더 많이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일본어를 매일매일 할 수 있다는게 정말 좋아서 저절로 웃게 되었던 것도 있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お名前って何て言うんですか?"

(이름이 뭐예요? - 일본은 한자의 읽는 방법이 다양해서 사람마다 같은 한자라고해도 이름이 다를 수 있다-)

로 흔한 질문으로 시작해서,

"これハンバーグですか?ハンバーグはケチャップとポン酢、何をかけて食べるんですか?"

(이거 함바그예요? 함바그에는 케챱이랑 폰즈랑 어떤걸 뿌려서 먹어요?)

와 같은 바보같은 질문도.

하루종일 쉬지 않고 계속 말을 했다.

상대는 내 서툰 일본어를 재촉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오래도록 기다려주었다.

점점 이야기를 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일본어를 잘하게 된 건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일본어 발음들이 너무나 많았다.

탁음이라든가, つ라든가 ふ라든가.

우리가 한국에서 배웠던 발음과는 너무 달라서 가끔씩 의사 소통에 작은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ビザ비자, ピザ피자인데

우리가 말하듯 비자라고 발음하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피자라고 알아들었다.

그런 것조차 몰랐던 나는 무엇이 문젠지도 모르고 계속 왜 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할까 답답해했다.

특히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일본인들 특성상 내 발음을 고쳐줄 리 만무했다.


그 중, 한 명 남자 아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보다 아마 7살이 많았던 일본 남자 아이.

그 친구는 내 마음을 잘 알아주어서 내가 발음이 될 때까지 여러번 고쳐주었다.

그래도 오래도록 굳어진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와 하는 매일매일의 발음 연습은 즐거웠다.

매일매일 힘들지만 즐거운 일들이 하나하나 늘어가며, 내 일상은 너무나 완벽할만큼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잘 웃는 나를 좋게 봐주신 분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언니들은 더더욱 나를 못 마땅해했다.




그 때부터 언니들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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