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도 고민 많았지. 그냥 막연하게 환상만 품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 단체도 만들어서 운영했으니까. 겨우 25살에 수익 모델을 만들어 단체를 운영했던 A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와 함께, 당시 A를 부러움 반 질투 반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과거의 내 모습도 생각났다. 한 번씩 상상해. 만약 전공을 살리지 않고 꿈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A의 표정에선 씁쓸함이 묻어났다. A는 기계공학부를 전공했고 강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계공학부를 전공하고 작가의 꿈을 품었던 나는, A의 착잡한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로부터 무려 5년이 흘렀다. A는 치열한 고민 끝에 대기업에 취업했다. 반면 나 역시 치열한 고민 끝에 전공을 포기하고 출판사 일을 하고 있었다. 꿈을 향해 좀 더 열심히 노력한 건 내가 아니라 A였는데, 운명의 장난인 걸까.
A는 첫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자정에 퇴근하는 생활을 몇 달이나 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한테 그렇게 일을 시켜도 될까 싶은데, 딱히 위에서 뭐라 하진 않더라고. 자기들이 시킨 일이거든. 성과가 보이거나 티가 나는 일들은 자기들이 다 하고, 서류 정리나 보고서 정리처럼 시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만 나한테 다 떠넘겼어. 그때 너무 힘들더라. A는 그때부터 탈모약을 먹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니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머리카락이었다. 문득 대기업에 다니는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탈모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새 탈모는 유머 정도로 소모되는 소재가 아닌, 또래들이 사회생활을 간신히 버티며 겪고 있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대기업이다 보니 사람을 함부로 못 짜르잖아. 좋게 말하면 안전망이 있는 건데, 나쁘게 말하면 진짜 이상한 사람들, 절대 여기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사람들도 절대 안 짤린다는 거야. 일은 하나도 안 하고, 후임들 성과 뺏고, 회사에 도움은 하나도 안 되고, 그러면서 맨날 일찍 퇴근해서 한가하게 시간 보내고. 그래도 회사에 잘만 붙어 있더라. 한 번은 인사이동 때문에 조사를 한 적이 었거든. 다른 부서에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마침 내가 자격이 되었어. 그래서 선임한테 물어보니까, 지원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원했는데, 퇴근 시간이 지나자마자 전화가 오더라. 바로 나한테 쌍욕 하더라고. 미친놈이, 눈치가 그렇게 없냐면서.
A는 이어서 연봉 이야기를 했다. 대기업이라 해서 크게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적다고 했다. 그래도 성과금 같은 게 있지 않냐고 물으니, 자기 분야는 늘 성과가 안 나서 이제까지 성과금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일은 많은데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고, 일은 일대로 하고 법에 걸려서 돈은 못 받는다고 덧붙였다. 막막하지. 뭔가 뚜렷한 미래가 있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 최근에는 주위 사람들이랑 스터디를 시작했어. 그냥 단순히 영어 공부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해서 새로운 분야,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창의적인 아이템 개발하는 거야.
막상 진로 고민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 가족 문제를 포함해서, 당시 여러 사정이 있었으니까. A는 당시를 회상하며 차근차근 말했다. 만약 그때 창업을 했으면, 올해 코로나로 직격탄 맞았겠지.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직 늦은 건 아니니까. 그래서 스터디도 하고 있는 거고. 그리고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책도 꼭 써보려고. 그러니까 많이 좀 알려도. A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긴 내가 계산할게. 2차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