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오 Sep 25. 2020

그래도 이번 만큼은 다르겠지

또 헤어지고 상처받을 거 알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기대로 시작하는 거지

   간만에 만난 C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얼마 만이지. 너 출장 다녀오고 처음 아니가. 여기저기 밥 먹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마라샹궈? 이거 맛있나. 어, 내 요즘에 마라에 빠졌다. C와 나는 곧장 가게에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 주문이요-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는 텅텅 비어 있었다.


   C는 균형 잡힌 친구였다. 대학 시절에 공부를 잘했고, 어학연수며 여행이며 대외활동이며 취미 생활이며 자기관리며 모두 적절하게 잘 해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연애도 많이 했다. 짧게 짧게 만나는 연애가 아닌, 1년, 2년이 넘는 연애를 꾸준히 해왔다. 20대 중반, 취업 준비를 착실하게 했던 C는 대기업 취업에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물론 연애 사업도 꾸준히 잘 해나갔다. 특히 작년에는 2년 가까이 만난 여자친구를 우리 앞에 소개해주기도 했다. 얼핏 듣기론, 결혼까지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C는 자신의 연인과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지 않았을까.


   아, 이거 간이 너무 강한데? 원래 이 맛 맞나. C는 연신 물을 들이키며 투덜거렸다. 맛있기만 한데. 니가 아직 마라 맛을 모르네. 이른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조금은 뜬금없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연애 이야기가 나왔다. 니 왜 헤어졌다고 했지. C는 입에 넣은 음식물을 우물우물 씹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안 맞아서 헤어졌지, 뭐. C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엔 좋았지. 그래서 너희들한테 소개해준 거고. C는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옛 연인을 회상했다. 걔는 나랑 연애하자마자 자기 친구들이랑 연락도 안 하고 잘 안 만나더라고. 그나마 일을 해서 다행이긴 했는데, 그 외 시간에는 나 만나는 거 말고 뭘 해야 할지 몰라 하는 거 같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랑해서 그런 거긴 한데, 어느새 집착도 심해지더라고. 그래서 걔랑 연애하는 동안 동아리 활동이나 스터디 이런 거 전혀 못 했다. 그냥 편하게 연락하고 지내던 여자 후배, 동생들, 친구들도 모두 연락 끊겼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C가 집에 꼼짝없이 붙어 있었을 생각을 하니 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 보니까 잘 만나는 거 같던데. 작년 C의 전 연인과 함께한 술자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잘 만났지. 그런데 1년 넘게 만나다 보니 부딪히는 지점이 생기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걔는 걸핏하면 토라지고, 삐지고, 서운해하더라. 그게 우리 둘 관계의 문제일 땐 나도 계속 풀려고 노력했지. 내가 먼저 사과하고, 다가가고. 그런데, 그게 반복되니까 나도 지치더라. 특히 우리 관계가 아니라 회사에서, 아니면 주위 관계에서 부딪히는 문제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어느 순간 내가 감당하고 있더라고. 결국 나도 힘들어서 그런 걸 못 풀어줬고, 걔는 서운함이 계속 쌓인 거지. 그러다 결국 헤어졌지, 뭐. C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다른 메뉴 하나 더 시킬까.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다행히도 C는 몇 달 간의 휴식 후 새로운 연인과 만나고 있었다. 이번 연애는 어떤데. C의 표정은 좀 전과 사뭇 달라졌다. 전 여친이랑은 정 반대 성격이다. 엄청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타입? C는 자신의 연인과 처음 만난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줬다. 헤어지고 몇 번 소개를 받았는데, 매번 실패했다. 내가 마음에 들면 상대방이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상대방이 나한테 호감 표현했는데 내가 마음이 안 가고. 그래서 나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지금 여자친구는 좀 다르더라고. 점원이 메뉴판을 가져왔고,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사이드 메뉴 하나를 골랐다. 여기 마라만두 하나 주세요- 메뉴를 시킨 후 C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내가 먼저 호감 가졌고, 애프터 신청도 먼저 했지. 이제 100일쯤 만났나? 때마침 C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연인에게 카톡이 왔는지, C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잘 안 싸우겠네. 뭐, 그렇지. 자기도 이것저것 많이 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 해도 별로 섭섭해하거나 그런 거 전혀 없고. C는 마라만두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성격이 털털하고 좋다 보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너무 많더라. 특히 남사친도 꽤 많고. 못 믿거나 그런 건 아닌데, 친한 사람들끼리 술자리 가진다 하면 항상 남자가 섞여 있더라고.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얘도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취미생활도 왕성하게 하니까 가끔은 불안하더라. C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라는 거가. C는 피식 웃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냥 그렇다고. 어떤 연애든 다 조금씩 힘들고 어려운 지점이 있지 않겠나.


   어느새 접시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 맛있긴 한데 간이 좀 강하다. 마라는 영 내한테 안 맞네. C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투덜거렸다. 아무튼, 전 여친이랑 헤어졌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 주위에서 워낙 소개받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나가면서도, 사실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컸고. 연애를 몇 번 하다 보니까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과정인지 너무 잘 알고 있고, 그게 다 뻔하게 느껴지더라. 처음엔 좋았다가, 서로 익숙해지면서 부딪히는 지점이 생기고, 그게 반복되다 보면 결국 헤어지고. 그래서 사실 지겨웠거든. 근데 또 좋은 사람 나타나니까 달라지더라고. 호감 가지고, 설레고, 서로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나가는 과정이 재미있고. 연애가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또 헤어지고 상처받을 거 알지만, 그래도 이번 만큼은 다르겠지 하는 자그마한 기대로 시작하는 거지. 너무 멋있는 척하는 C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중간에 말을 가로챘다. 니는 연애 너무 많이 했다. 기대 그만하고, 이제 좀 쉬어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자. 돈 많이 버는 니가 사라.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계산서를 내밀었다. 좀 이따 현금으로 줄게. 계산대 앞에 서 있는 C를 뒤로하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빽빽한 간판들은 제각각의 색으로 화려하게 밤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유난히도 밝은 빛을 내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날파리, 나방 등이 전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불빛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이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