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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Jan 23. 2021

시간이란 이토록 무섭구나

헤어지는 데도 무덤덤해서 더 슬펐어

이제 먹어도 돼요?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는 곱창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배가 고파진다. 드시면 됩니다, 점원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소주잔을 기울였다. 으, 오늘은 왜케 쓰지. 곧장 젓가락으로 잘 익은 곱창을 한 점 집었다. 와, 여기 진짜 맛있네요. 오늘은 강연비 받았으니까 제가 쏠게요. 아, 근데 뭐해요. A 형은 소주 한 잔을 끝으로 계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회사 SNS에서 뭐 하나 올려야 해서. 아니,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내일 올리면 되죠. A 형은 나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오늘 올려야 해서, 쏘리. 잠시만. 그리 중요한 게시물도 아닐 텐데 필요 이상으로 책임감을 가지는 모습이나, 저렇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회사 SNS 계정에 형식적인 글을 쓰고 있는 거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대의 끝자락을 맞이하는 시점, A 형이 만든 프로그램에 연사로 초청돼 모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프로그램은 잘 마무리되었고,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보답도 하고 뒷풀이 겸 근처 곱창집에 둘이 온 것이다. 아홉수가 만만치 않을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연애도 시작하고 책도 내며 환상을 걸어다닌 한해였다. 반면 나보다 한 살 많은 A 형은 유난히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우선 일이 너무 많았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에도 일하는 일이 빈번했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는 4년간 만나왔던 연인과 이별을 맞이했다. 아무리 내가 행복해도,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 요즘이었다.

형, 괜찮아요? 어느새 소주 한 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불판 위에 올려진 곱창은 더 이상 그 전과 같은 설렘과 기대를 주지 않았다. 괜찮지, 뭐. A 형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도 4년을 만났는데, 힘들지 않아요? 힘들지. 그래도 뭐 어쩌겠냐.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회사에 늘 보는 사이였지만, 자세히 들은 적은 없어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뭐. 오래 만나다 보니까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졌고, 안 맞는 부분이 계속 보이니까 자연스레 헤어졌지. A 형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뭐가 안 맞았는데요? 걔도 사회초년생이라 회사 일이 힘들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 그런데 힘들수록 스스로 동굴을 파고 계속 깊숙히 들어가더라고. 처음엔 옆에서 위로도 해주고 도와줬는데... 나도 초년생이고, 너도 알다시피 이 분야 일이 항상 불안정하고 늘 힘들잖아. 나도 힘드니까 위로해줄 힘이 안 남아 있더라. 나도 지치는 거지. 그리고 연애 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서로 설렘도 사라지고, 의무감에 만난다는 느낌도 있었고. A 형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2년 만나고 크게 다퉜을 때 한 번 헤어질 뻔했어. 그때 화가 정말 많이 났는데, 정작 만나니까 웃음부터 나오더라고. 그렇게 잘 만났으면 되는데, 사실 그 이후로도 그리 좋진 않았어.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설렘이 안 느껴지더라고. 3년이 지났을 때쯤, 권태기가 왔다는 걸 서로 인식했어. 걔가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보고 싶다고 나한테 직접 얘기까지 했을 정도니까. 그래도 오래 만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습관처럼 계속 만났어. 형, 구이 다 먹었으니까 이제 전골 먹을까요? 저기요- 아직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A 형의 이야기는 낯설게 다가왔다. A 형도 분명 설렘과 기대 속에서 연애를 시작했을 텐데,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걸까. A 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 4주년을 앞두고 있었는데, 뭔가 자신이 안 섰어. 4년을 넘으면 이대로 진짜 결혼까지 갈 거 같은데, 그럴 엄두가 안 나는 거야. 둘 다 마음은 식었고, 근데 만나온 시간이 길어서 서로 못 헤어지고 있고.

전골이 나올 때쯤 테이블에는 빈 소주병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럼 형이 헤어지자고 한 거에요? 그렇긴 한데, 뭔가 흐지부지 됐어. 만나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서로 일정이 안 맞아서 계속 미루다가 그냥 그렇게 끝났어. 2년 만나고 처음 헤어질 뻔했을 땐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나 애정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헤어질 땐 그런 것도 없었어. 헤어지는 데도 무덤덤해서 더 슬펐어. 차라리 그 전에 헤어졌으면 이별 이후에도 그리움이라든가 그런 게 있을 텐데, 결국 2년 넘게 형식적인 관계를 질질 끌어오다가 별 감정 없이 정리되니까 뭐... 엄청 안타깝지. 무려 4년이나 만났는데, 그렇게 끝났으니까. A 형이 나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안주 좀 먹어라. 아뇨, 괜찮아요. 처음엔 먹음직스럽던 전골은 한두 국자 먹고 나니 손길이 잘 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래도 4년을 만났는데 마지막엔 만났어야 하지 않았나 싶어.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만나려고 했으면 만났을 테니까. 그런데 한편으론, 직접 만났으면 헤어지지 못했을 거 같기도 하고. 사실 비겁한 거지. 그때 헤어지자는 얘기를 안 꺼냈으면 지금도 만나고 있을 거야. 오랫동안 봐왔던 사이이고, 서로 사랑했으니까. 만나면 좋긴 했거든. 막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욕하면서 헤어지는 경우는 의외로 없더라. 서로 점점 식어가는 거고, 자연스레 멀어지면서 이별하는 게 더 많은 거 같아. A 형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잔이네요. 에이, 좋은 사람 또 만나겠죠. 그래, 너도 연애 잘해라. 꼭. 행복해라. 마지막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가게에 들어올 때만 해도 간만의 술자리에 들떴던 마음은 푹 가라 앉아 있었다. 빨리 익기만을 바랐던 곱창구이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서 접시 위에 볼품없이 놓여져 있었다. 곱창전골 역시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이란 이토록 무섭구나, 새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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