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오 Feb 28. 2021

이제 우리 팸에도 유부남 생기는 거가

오늘의 술자리를 훗날 미치도록 그리워할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 넘게 남았음에도 A와 B가 계속 재촉한 탓에 결국 집을 나섰다. 둘의 목적은 단순했다. 대학교 캠퍼스를 거니는 것. 졸업한 지 어느새 4~5년이 지났다. 둘은 지금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어, 이따금 대학 캠퍼스가 그립다고 했다. 졸업 후에도 여전히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겐 친구들의 행동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볼 것도 없는데, 왜 굳이 가려고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대학 캠퍼스를 천천히 거닐었다. 없어진 건물도 제법 보였고, 새로 지어진 건물도 눈에 띄었다. 20살 때 처음 이곳에 왔는데, 벌써 31살이라니.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들 20대 중후반에 취업했으니, 여기서 20대의 절반을 보낸 셈이다. 이따금 혼자 올 때도 있어 캠퍼스 자체가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은 친구들과 함께 거닐다 보니 기분이 묘했다.

캠퍼스를 나와 보통 '쪽문'이라 불리는 곳을 거쳐 학교를 빠져나왔다. 대학가 근처답게, 학교를 나오자 수많은 술집이 즐비하게 펼쳐졌다. 캠퍼스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곳과 낯선 곳이 번갈아 나타났다. 와, 여기 아직도 있네. 니 첫사랑한테 실연당한 곳 아니냐. A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 전 여친이 여기 크로아상 좋아했는데. B도 한 베이커리 앞에 멈춰서더니 추억에 젖은 채 말헀다. '전'이 아니라 '전전' 아니냐. 그거나, 그거나. 둘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가게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며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

셋이서 가볍게 술 한잔하고 있으니, 이내 C가 도했다. 니가 약속 잡았으면서 왜 이렇게 늦노. A의 핀잔에 C는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C는 물 한 잔 마시더니, 이내 외투 주머니에서 봉투 세 장을 꺼냈다. 자, 청첩장. 기대와 설렘의 표정이 전혀 없는, 심지어 오늘 약속조차 나오기 귀찮아한 듯한 모습과, C의 입에서 나온 말의 간극은 무척 컸다. 그 모습이 지극히나 C 답긴 했다. 역시 정 없는 놈. 오, 진짜 청첩장이가. 우리 이름도 적혀있네? 이제 정이라는 게 생기는 거가. 진심 결혼하고 나서 우리한테 말해줄지 알았는데. A와 B는 청첩장을 받으며 한껏 높아진 목소리로 연신 감탄했다. 청첩장에 오탈자 없는지 볼게. 그에 질세라, 나 역시 청첩장 문구를 유심히 보며 헛소리를 거들었다.

C가 청첩장을 돌리며 거하게 한턱 쏘는 자리. 우리는 소고기를 쉴 새 없이 먹어댔다. 결혼 준비는 잘 돼 가나. 요즘 맨날 싸우지, 뭐. B의 물음에 C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너희는 7년 넘게 만나서 서로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니, 결혼은 진짜 현실이더라. 혼수부터 시작해서 결혼식 언제 어떻게 할 건지, 대출 어떻게 받을 건지, 결혼 후에 수입은 어떻게 할 건지. C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답했다. 니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여친이 빡쳐서 그런 거 아니가. 신경 좀 써라. C는 A의 핀잔을 자연스레 무시하며, 불판 위에 놓인 고기를 한 점 집었다. 니 용돈은 얼마 받는데. 한 달에 30. 나머지는 다 모으기로 했고. 대출도 많이 받아서 이자도 갚아야 하고. C의 대답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30만 원? 진짜? 그걸로 어떻게 사노. 그러니까 오늘이 거의 마지막이다. 오늘 한 30만 원 나오겠는데. 많이 묵자. 여기 고기 좀 더 주세요! C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더니, 이내 종업원을 불렀다.

요즘 다시 주식 많이 내리던데. 야, 너희들은 주식으로 얼마 벌었냐. 작년에 한참 오를 때 몇백 벌었지. 근데 요즘 내려서 까먹은 것도 많고. A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나는 예전에 많이 했고, 요즘엔 별로 안 하는데. B의 대답을 들은 후, 이번엔 C를 보며 물었다. 니는? 나는 부동산 쪽으로 계속 알아보고 있지. 근데 최근에 대출까지 받아서 산 집이 조정지역으로 걸려서 망했다. 셋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나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나도 주식 시작해볼까. 헐, 니도 할려고? 내가 좋은 종목 가르쳐줄까? 니 최근에 많이 잃었다며. 야, 근데 우리 엄마도 주식하시거든. 그것도 매달 돈 많이 내면서 컨설팅까지 받으시는데. 근데 컨설턴트가 하라는 데로 했는데 투자한 종목 싹 다 마이너스래. A는 큭큭 거리며 말했다. 근데 너희는 주식이나 부동산 하면서 안 불안하나. 나의 질문에 C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결혼 준비해봐라. 다 돈이다. 집값도 존나 올라서 대출 안 받으면 엄두도 못 내고. 월급만 모아서 절대 결혼 못한다. 돈 계속 굴려야지. C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고기를 다시금 불판 위에 올렸다.

와, 그래도 진짜 결혼하네. 이제 우리 팸에도 유부남 생기는 거가. B는 소고기 한 줌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결혼 안 하나. 세 명의 빈 잔에 각각 술을 채워주며 물었다. 다들 1년 넘게 만나지 않았나. 몰라, 아직 생각은 없는데. 예전에는 일찍 결혼하고 싶었는데, 요즘에는 결혼을 꼭 해야 하나 싶다. 28살에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는 B가 결혼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으니, 그 모습이 새삼 놀랍게 다가왔다. 다들 결혼하지 말고 우리끼리 모여서 살까. 지랄하지 마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와, 오늘 얼마 안 먹었는데 왜 이렇게 취하는 거 같지. 와, 니 진짜 술 못 먹네. 이제 나이 들어서 그렇다. 오늘 먹은 고기 소화도 잘 안 될걸. 아니다. 우리 아직 젊다. 이제 겨우 서른하나인데. 한 가지 주제로 모이지 않고 시끌벅적해지는 걸 보니, 술자리가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니 왜 헤어졌다고 했지. 야, 내 전 여친이 얼마 전에 결혼했다고 말했나? 나 20살 때 만난 사람은 이제 애 엄마다. 야, 그때 니 전 여친 인스타 들어가 보자. 내 여친 블로그 시작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이랑 간 곳도 사진 보내달라고 함. 자기 올릴 거라고. 아니 그래서 왜 헤어졌냐고. 이거 먹고 어디 가지? 아이스크림 내기하자. 사다리 탈까. 캠퍼스 갈까? 거기 가면 그냥 기분 좋아짐. 거기 턱걸이 기구 있는데, 우리 내기할까. 내 요즘 운동 졸라 열심히 한다. 만져봐. 돌이다, 돌. 술자리는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1년째 상태가 좋지 않은 친구 놈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얘네는 언제 철이 들까 싶다. 술기운 탓일까. 왠지 오늘의 술자리를 훗날 미치도록 그리워할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