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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Sep 15. 2021

급등과 급락이 없는 세계

책이란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매개이다

지난 9월 첫째 주, 비트코인은 5만 달러를 돌파했고 이더리움은 4000달러 근처까지 올랐다.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잠시 주춤하던 주식은 다시 오르는 분위기이며, 온갖 정책에도 집값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내리는 순간이 있으니 오르는 순간도 있겠지만, 이 변화의 폭이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는 건 분명하다. 이러한 모습을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급상승과 급하강이 반복되는 모습이지 않을까.


이렇게 하루하루 빨리 변화하는 세계와 달리, 출판의 세계는 비교적 천천히 흘러간다. 물론 책이 아닌 다른 상품들 역시 구상 단계부터 최종 판매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 에너지가 들긴 하지만, 별다른 실험이나 테스트 단계가 없다는 걸 생각할 때 책은 제작하는 데 시간이 꽤 필요한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디자인 요소도 많이 없어 보이고, 글만 잘 쓰면 금방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책을 만들다 보면 속도 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책을 처음 기획해서 만드는 건 허허벌판에서 길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고 수급 과정에서 일정이 미루어지며 처음 생각했던 방향과 달라지는 건 다반사고, 작업이 중단되는 경우도 많다. 간신히 원고를 받았더라도 글을 다듬고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원고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든 몇 권의 책을 살펴보면, 처음 아이디어를 내고 책을 쓰기로 결정한 후 책 출간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편집자마다 작가마다 책을 쓰고 만드는 기간은 천차만별이며, 오랫동안 공을 들일수록 좋은 작품이 나오기에 1년 남짓한 시간은 오히려 가볍고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개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위주로 기획했기에, 그리 짧은 시간이라 하기도 어렵다.


지금 출간을 앞둔 책은 작년 상반기에 처음 아이디어를 내고 작가에게 제안했던 아이템이다. 반대로 지금 기획을 시작한 책은 내년 혹은 내후년에 결실을 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책 출간 이후에도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책을 내자마자 갑자기 이슈가 되며 날개 돋친 듯 잘 팔리는 책은 거의 없고, 무명작가가 하루 만에 스타작가가 되는 경우도 드물다. 다양한 작가와 만나서 작업하다 보면, 이들의 삶은 ‘갑자기’라는 단어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이들은 대부분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느리지만 단단하게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다.


급등과 급락이 없는 이 세계의 특징은 모두 책이라는 상품에 응축되어 고스란히 나타난다. 영상마저 10분이 넘으면 길다며 관심을 못 받는 시대에, 몇 시간 동안 정독해야 겨우 읽을 수 있는 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매체로 비친다. 그럼에도 10분짜리 영상이 책 한 권보다 유익하다고 함부로 말할 순 없다. 아무도 책을 안 읽는 시대라 해도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위로받고, 그동안 접하지 못한 세계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활용할 것이다. 책은 삶을 단기간에 기적처럼 바꿔주는 요행과는 거리가 먼 상품이다. 한두 권으로는 어림도 없다. 몇백, 몇천 권이 필요할 수도 있다. 수백 수천 수만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모든 게 빠르게만 흘러가는 시대에 이러한 엄청난 숫자가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이란 원래 느릴 수밖에 없는 매체이자,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무언가를 쌓아나가는 매개이다.


우리가 책과 점점 멀어진다는 건 느리지만 단단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법, 무언가를 천천히 알아가는 법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빠르게만 흘러가는 것들이 우리의 삶 깊숙이 자리 잡은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파도에 맞서 천천히 제방을 쌓는 일이다. 당장은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제방 쌓는 일을 무턱대고 서두를 수 없다. 급하게 쌓은 제방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가을이 되었다. 그저 빠르게만 흘러가는 세상 속에 잠시나마, 아주 느린 세계에 발을 디뎌 보면 어떨까. 어쩌다 식상하고 민망한 말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닌가.

국제신문 <청년의 소리> 원문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10908.2202100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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