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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Jul 18. 2021

당신의 우주는 어떤 우주와 연결돼 있는가

오늘도 수많은 우주가 전국 서점으로 뿌려지고 있다

2019년 7월 경기 화성시의 어느 돼지 농가에서 아기 돼지가 태어났다. 동물권 단체 DxE 코리아는 오물과 쓰레기, 악취로 가득한 분만사에서 그 아기 돼지를 구출했고, 이후 ‘새벽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줬다. 새벽이는 보호소에서 무럭무럭 자라다 1년 뒤 농장동물의 안식처인 ‘생추어리’에 정착해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지난해 5월 15일 자 기사 ‘국내 최초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가다…‘고기’와 다른 삶 꿈꿔도 될까요’의 내용이다.


작년 5월 기사를 보자마자 새벽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며 무작정 연락했다. 다행히 출간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고, 서울에 올라가 DxE 코리아 활동가 세 분과 미팅을 진행했다. 당시 나는 동물권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책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과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얘기라는 막연한 환상만 있었다. 그런 상태로 용케도 동물권에 관한 책을 기획하게 되었으니 돌이켜보면 운이 참 좋았다.


출간 작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글 중 하나로 남았을 신문 기사는 하나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고, 머릿속에서 금방 잊혔을 새벽이라는 존재는 원고 수급 과정을 통해 어느덧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다가왔다. 어느 원고에서는 찐 감자와 바나나를 좋아하는 존재로, 어느 원고에서는 진흙 목욕을 좋아하는 존재로, 또 어느 원고에서는 코로 교감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렇게 새벽이는 무수히 많은 돼지 중 하나가 아닌, 이름을 가진 특별한 생명체로 큼지막이 자리 잡았다.


1년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어느새 원고 막바지 작업이 진행 중이다. 책 기획 단계에서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과 마주해야만 했다. 동물권이라는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치열했으며, 때론 먹먹함을, 때론 서글픔을 안겨주었다. 출간 작업을 그저 소비자에게 판매할 상품을 제작하는 행위로 생각했다면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책을 만든다는 건, 책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미지의 세계에 안테나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동물권에 대한 담론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한국 역시 동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노력 덕분에 중요한 사회 담론으로 새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저 내가 관심이 없었고, 무지했을 뿐이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새벽이와 같은 존재를 종종 만나게 된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거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이들처럼, 늘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책 너머에는 늘 아픔으로 점철된 삶이 발버둥 치고 있었고, 그 속에는 우리 사회에 꼭 나와야만 하는 이야기가 꽁꽁 숨겨져 있었다. 책을 만든다는 건 세상에 없던 걸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 이미 존재해왔지만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을 무수히 많은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에 가까웠다.


책을 만드는 행위와 책을 읽는 행위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보다 재미있는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촉수를 뻗기 위함일 것이다. 개인이라는 협소한 세계에 갇혀 있다 보면 세상의 수많은 존재가 너무도 쉽게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혐오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을 가진 한 개체와 연결이 되면 그 개체가 속한 집단을 함부로 욕할 수 없게 된다. 책은 이러한 연결의 시작이다.


생산자 집단에 속해 있다고 하지만, 편집자 역시 모르는 것 투성이다. 잘 아는 분야의 책을 만들 수도 있지만, 낯선 세계와 마주하며 서툴고 미숙하게나마 배워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오늘도 여러 편집자의 손에서 무수히 많은 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하나의 생명이 곧 하나의 우주라면 한 생명의 지난한 삶과 아픔을 담은 책 역시 하나의 우주일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우주가 전국 서점으로 뿌려지고 있다. 당신의 우주는 어떤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가.


국제신문 <청년의 소리> 원문 링크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210616.2202100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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