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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Jun 25. 2022

당신은 지금,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변화의 시작은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경청(傾聽)에 있다

20대 후반, 편집자 직함을 달고 처음 기획한 책은 육아 에세이였다. 그때 처음으로 출산과 육아, 돌봄, 경력단절 문제 등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다. 약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처음 호흡을 맞췄던 작가님에게 제안했다. 첫 단행본은 작가님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수집해보자고. 그렇게 2020년 8월에 처음 논의를 시작했다.

처음엔 작가님 지인 위주로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여기저기서 소개를 받으며 인터뷰 대상을 조금씩 확장해나갔다. 모두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 하나하나는 모두 특별했다. 경력단절 문제는 최근에 대두된 문제가 아님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남루했다. 자신의 아픔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터뷰이의 반응도, 이토록 절절한 이야기가 평범하다고 인식될 수 있다는 사실도, 무엇보다 많은 여성이 겪는 일임에도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현실도 모두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조금만 돌이켜보면, 육아를 하더라도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경력이 단절되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을 내뱉었던 사람은 불과 얼마 전의 나였다. 서른여 개의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해선 안 된다며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었던 경력단절 문제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사연으로 다가와 나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었고, 과거의 무지했던 나를 반성하게 했다. 서른여 개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작업은, 편집자로서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는 일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책에는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러 여성의 이야기와 더불어, 4년간 함께 호흡을 맞춘 디자이너 선배님의 임신 소식을 듣고 고뇌에 빠진 나의 이야기와, 30여 년간 경력 아닌 경력을 쌓아나간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경력단절 문제가 결코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고,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스스로 깨닫기도 했다.

차별과 배제는 악의에서 오지 않는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행동할 때, 일부의 문제라 단정 지을 때,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괜히 삐딱하게 보지 말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억압할 때,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으라고 말할 때, 우리의 일상 속에 성큼 녹아든다.

이 책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 어쩌면 혐오에 대해, 그저 '육아 문제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납작하게 묘사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사를 부여한다. 누군가의 사연을 들으면, 그렇게 누군가를 미약하게나마 알게 되면, 우리는 함부로 그들을 욕하고 비난할 수 없다. 이 감각이 중요한 이유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주위 여성들에게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오늘도 힘들어하고 있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로 연결을 확장하며 그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들어야 공감할 수 있고, 상처를 위로하고 어루만질 수 있으며,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들었는지 떠올려보면, 딱 그만큼이 내가 가진 공감의 폭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아픔을 호소한다고 삶이 기적처럼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이다. 경력단절 여성 문제 역시,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집단에 가려진 개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번 작업이 아니었으면 원래 그런 거라고, 당연한 거라고, 남들도 다 겪는 거라며 간단히 치부되며 흩어지고 말았을 여러 목소리와 마주했다. 사회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도 없고 한 사람의 힘듦을 한순간에 사라지게 할 수도 없다. 다만 아픔에 공감하며 들어줄 수는 있다. 내가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고통은 이야기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야기된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변화의 시작은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경청(傾聽)에 있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거면, 충분하다." - 편집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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