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명징하게 직조된 언어를 위한 변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중략)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기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김훈, 『바다의 기별』 중에서
침착맨 유튜브에 이동진 평론가(이하 호칭 생략) 출연한 거 보고 예전에 했던 생각 짧게.
나는 이동진의 <기생충> 한줄평을.. 좋아한다. 어쩌면 <기생충>이란 영화 자체보다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공들여 쓴 문장인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무 살 때쯤에 김훈 선생의 위 글을 읽고 난 뒤로, 손을 떠나는 문장마다 전부 사전을 뒤지며 단어를 고르고, 담고 싶은 의미를 다시 따지고, 써놓은 문장의 어순과 조사를 바꿔서 하나씩 씹어보며 최적의 배치라는 확신이 든 후에야 마침표를 찍는 버릇이 생겼다. 덕분인지 팔자에 없었던 글 잘 쓴다는 얘기도 가끔은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실로 가성비 떨어지고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어느 날은 운이 좋아 쓸 만한 글이 문장째 뚝 떨어지기도 하는 반면에, 어느 날은 안 굴러가는 머리에서 글줄 몇 가닥 뽑겠다고 애쓰다 저녁이 새벽이 된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이동진의 <기생충> 한줄평은 그런 고단함 끝에 내가 쓰고 싶은 종류의 문장이다. 이 문장은 정치精緻하다. 명징, 직조, 신랄, 처연, 우화라는 모든 단어가 서로 한 치의 겹침 없는 각자의 의미를 문장에 부여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 문장은 더 이상 같은 문장이 아니다. 이 한줄평이 알려졌을 때 쓸데없이 어렵다고 구설에 올랐던 것을 기억하는데, 일상에서 벗어난 어휘가 섞여 있고 어려운 문장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쓸데없이] 어려운 문장이라는 표현에는 수긍할 수 없다. 이 문장은 도리어 쓸데없는 부분을 죄 도려내고 뼈만 남아서, 토씨 한 글자라도 빼냈다간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한 문장이다.
언어는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항상 생각한다. 공들인 고민으로 세공된 문장에 대해 "쓸데없이 어렵게 쓴다"는 평이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양산형 스테인리스 물컵을 떠올린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분식집 가면 정수기 위에 대여섯 개씩 겹쳐서 쌓여 있던 그거. 스테인리스보다 스뎅이라고 부르면 좀 더 어울리는 그거. 이런 컵은 용도에 맞게 쓰일 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그릇이지만, 깨질 위험까지 있는 주제에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유리잔이 무슨 소용이냐며 다른 잔들을 밀어내고 맥주도 와인도 제가 담으려 들면 우리의 삶은 부박하게 쪼그라든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