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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oJang Aug 04. 2019

시베리아는 혼자다 (2)

절망의 끝에서 도망치듯 떠난 동토의 땅,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이야기

러시아 군인 열차


일주일 동안 먹고 자야 하는 열차가 러시아 군인들로 가득 찬 기차라니... 이건 전혀 예상에 없었다. 군인들을 가득 태운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내릴까? 이 군인들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니 숨이 막혀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되겠지 무슨 일이 생기겠어? 일단 부딪혀 보자.

위층 침대를 썼던 착한 청년, 이반

내 위에 2층 침대에도 러시아 군인이 자리를 잡았는데 이름은 '이반'이었다. 이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차에 탄 군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의무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워낙 나라가 크다 보니 복무 중에는 집에 가지 못했고 제대하고 처음으로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다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듯 연신 웃고 떠들어 댔다. 우리나라의 제대한 군인들과 별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했던 나도 어느새 설렘이 가득한 편안한 분위기 속에 젖어들었다. 앞으로 며칠을 이 친구들과 함께 지내야 하니 친하게 지내야겠다.


시베리아의 밤 그리고 새벽

침대에 누웠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노을은 자장가다.

밤 10시 30분이 되면 기차는 소등한다.  

소등을 한다고 모든 기차가 잠에 드는 것은 아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각자 방식대로 밤을 맞이한다. 2층 침대 '이반'은 늦은 끼니를 때우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친구들과 늦은 수다를 떨거나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에는 군인이라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 친구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동생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고나니 친근하게 느껴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맞는 첫 밤인데 이미 여러 날을 이곳에서 보낸 듯 익숙하다. 다만, 침대가 생각보다 짧아서 다리를 쭉 뻗지 못하는 건 아쉽다. 여행 기간 동안 다리 뻗고 푹 자는 게 소원이 될 것 같다. 조그마한 스탠드 불에 의지해서 머릿속의 복잡한 것들을 옮겨적으려고 했는데 흔들리는 차에서 글을 쓰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누군가의 설렘, 누군가의 아쉬움으로 가득한 이 기차에서 쉽게 잠들기는 힘들겠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 보니 쉬이 잠에 들기는 어려웠다. 중간에 들리는 알람 소리,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국적을 불문하고 여럿이 모여서 자면 똑같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마침 5시 20분에 15분간 정차하는 역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 역에 내렸다. 밤 사이 내린 비에 공기는 한없이 맑았다. 미세먼지 없는 하늘이 그리웠는데 이곳 공기는 티끌 하나 없는 것 같았다. 허파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담으려 연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새벽녘, 컵에 뜨거운 녹차를 담아 플랫폼에 나와 마시니 한동안 느끼지 못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소소함,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그걸 왜 한국에서는 못 느꼈을까...?  

멈춰있는 기차에 역무원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호스를 연결하고 그 사이로 조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빵을 파는 여인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러시아의 아침이 밝았다. 


기차에서의 일상

기차 내부의 샤워부스

아침에 샤워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화장실에 샤워 그림과 함께 러시아어로 무언가 설명이 적혀있고 150이라고 적혀있다. 아마 150 루블이면 샤워를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안내문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차장에게 보여주니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옆 객차 한쪽에 샤워시설이 있었다. 기차 여행치 고는 꽤 좋은 시설이었다. 차장은 손짓으로 찬물과 더운 물을 표시해주고 150 루블 받고 자리를 비켜줬다. 역시 150 루블이 맞았다. 러시아에 도착하고서 씻지 못해서 내내 찝찝했는데... 뜨거운 물도 제법 잘 나오고 수압도 괜찮았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이만하면 더할 나위 없었다.  


기차 안에서 끼니는 대부분 햇반으로 떼웠다.

따로 식사시간이 없기 때문에 알아서 제때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 밥을 먹기 위해 침대를 테이블로 바꾸는 것이 몹시 귀찮기는 하지만 일부러라도 끼니를 챙기지 않으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특히 갇힌 공간에서 움직임도 적어서 몸을 상하기 쉬운데 먹는 것이라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금세 병이 나버릴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여행을 오면 삼시세끼 현지 음식을 먹어도 마냥 좋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국에 밥을 먹지 않으면 영 기운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져온 햇반으로 조금 부족하지만 나름 든든하게 밥을 챙겨 먹었다.

역에 멈추면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잠깐이라도 땅을 밟기 위해 플랫폼에 내려선다

잠시 기차가 멈추면 내려서 주변을 걷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했다소나무 숲과 흙냄새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시베리아 공기는 맑다. 열차 멈추면 제일 먼저 내려 공기부터 한껏 들이마신다. 재빠르지 않으면 곧 뒤따라내리는 흡연자들로 플랫폼은 이내 담배 연기로 가득해진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걷고 스트레칭을 한 듯하다.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도 바빴는지 산책도 스트레칭도 못하고 살았을까?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책에 빠져 몇 시간을 내내 읽기만 하다가 문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음대로 끼적이기도 하고 멍하니 풍경도 보다가 한없이 늘어지게 낮잠도 자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 기차는 북쪽으로만 달리고 있다. 대륙의 동쪽 건너편에 있는 모스크바와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갈 길이 멀다. 

내가 서두르지 않아도 어차피 기차는 달리게 되어 있다. 

삶도 서두르지 않아도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고 나는 거기서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되는 거지 속도가 늦다고 서두르지 말자. 이제 하루가 지났다. 지금을 즐기자.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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