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가사에서 읽을 수 있는 연애상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행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 둘이 조잘대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하 뭐시기 하는 소리도 들리고 상 뭐시기 하는 소리도 들린다.
내겐 낯선 용어라서 귀에 박히지 않나 보다 싶었다.
내가 못 알아듣는 게 어디 그뿐인가 싶어 그냥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걸린 단어. 하남자와 상남자
남자답다는 의미의 상남자는 들어봤지만 하남자는 처음 들어봤다.
구글링을 해 보니 제법 연차가 있는 단어였다. 남자답지 못하고 속이 좁은 남자를 뜻한다고 적혀 있다. 침착맨과 주호미 방송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에 자주 등장했고, 지금은 상여자 하여자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글도 보인다.
저녁 식사 자라에서 상남자 하남자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처음 들어봤냐는 눈치다. 그러면서 발라드도 상남자 발라드 하남자 발라드로 나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호기심이 생겼다. 최근 트렌드는 상남자 발라드라고 하니 이전에는 하남자 발라드라는 소리일 테고.
하남자 발라드의 대표주자가 임창정이라고 했다. 임창정 노래를 뒤졌다.
먼저 대표적인 "날 닮은 너" (2002). "날 닮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 아직도 눈물 흘리며 서성이고 있어"라는 가사가 눈에 띄었다. 이별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상대를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는 식이다.
"소주 한 잔"(2003)에는 이런 가사도 있었다. "그댄 가나요 / 나를 두고 정말 가나요 / 나의 가슴이 이렇게 아픈데" 이별 후 술에 의존하며 상대방을 잊지 못하는 감정을 노래하고 있어. 가사 속에서 이별 후 상처와 미련이 극대화되며, 상대방을 잊으려 해도 쉽게 잊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아하 싶었다. 이런 걸 하남자 발라드라고 하는구나. 감정적으로 의존적이고, 이별 후에도 상대방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가사를 가진 노래인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몇 곡이 생각났다.
버즈의 "가시"(2005)에는 "그대 돌아오면 / 얼마나 좋을까 / 가시 같은 슬픔에 난 자꾸 난 웃음 짓는데"라는 표현도 나오고, 임재범의 "너를 위해"(2000) 도 "너를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강한 척할 수가 있었어"며 이별 후에 상대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추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SG 워너비의 "내 사람"(2004)은 "사랑했지만 보내야 했던 / 가슴 아픈 기억도 이젠 잊을 수 있겠죠" 역시 사랑했지만 결국 이별하고, 그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남겨두는 가사였다. 이런 류의 가사들이 대부분 2000년대 초반의 발라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2020년대에 들어오면 더 이상 집착하는 가사는 보기 힘들었다. 좀 더 쿨하고 좀 더 성숙된 가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별을 더 이상 집착이나 미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Crush의 "잊어버리지 마"(2020)에선 "우리 함께했던 날들 / 다 잊어버리지 마 / 너의 삶 속에 나를 담아 줘"라면 이별 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랄 뿐, 더 이상 재회를 희망하거나 감정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있다. 김필의 "그때 그 아인"(2020)은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서 / 아프진 않을 거야"라고 했고, 존박의 "이상한 사람"(2019)에선 "날 사랑하지 않는 그댄 나에게 이상한 사람"이라면 과거에 대한 미련보다는 자신을 존중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기준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 바뀌는 것 같다.
이별을 마주하는 태도가
예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지금은 하남자 발라드가 되는 세상이라니.
좀 더 자기 스스로가 소중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