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로닌, 존윅4, 모탈 컴백 등 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나섰던 작품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한국나이로 벌써 63세다. 치마 신이치가 지어준 예명인 사나다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55년이 지났다.
사나다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인 최초의 에미상(Emmy Awards) 남우주연상 수상자의 탄생이었다.
단상 위, 상기된 표정의 히로유키를 로스앤젤레스 피콕 극장(Peacock Theater)에 자리 잡은 모든 배우들이 올려다봤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서 사나다는 짧지만 강력한 소감문을 남겼다.
"It was an East Meets West Dream Project with Respect. Shogun taught me that when People work together, we can make miracles."
2022년 이정재가 <오징어 게임>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래 두 번째로 아시안계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더 이상 아시안계 남자 배우의 경계는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2024 쇼군(Shogun)은 리메이크 작품이다. 1975년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 1921~1994)의 원작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23주 동안이나 머물렀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 일본 제품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 등에 관심이 높아지던 시점이기도 했다. 1967년 미국 시장을 겨냥하고 만든 첫 컬러 애니메이션인 Speed Racer (달려라 번개호, 일본명 마하 GOGOGO)의 성공으로 인해서 일본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원작소설 <쇼군>은 1980년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고, 당대에 이례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2024 Shogun vs. 1980 Shogun
NBC 미니시리즈로 방송된 <1980 쇼군> 은 평균 26% 시청률을 기록해 누적 1억 2천만 명이 시청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81년 에미상 14개 부문에 후보로 선정되었고, 작품상, 의상디자인,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 이상 3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미니시리즈를 재편집해서 영화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2024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방송된 쇼군이 18개의 상을 휩쓴 것에 비해서는 약소할 수 있으니, <1980 쇼균> 역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몇 가지 지점에서 <1980 쇼군>과 <2024 쇼군>은 시장의 변화를 실감하게 해 준다. 두 작품 모두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미국 작품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에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라면 <1980 쇼군>과 <2024 쇼군> 모두 미국 자본과 미국 제작시스템을 통해 일본인 배우를 캐스팅해서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세부 항목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1. 로케이션 등 현지 지원 개념의 공동 제작이 사라졌다.
<1980 쇼균>은 NBC가 주도했지만, 아사히 프로덕션(Asahi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과 도호 프로덕션(Toho)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크레디트에는 NBC의 이름이 올라가지만, 사실상 공동제작의 형식에 부합했다. 일종의 현지 로케이션에 기반한 작품이다 보니 도호 스튜디오가 일본 내 주요 촬영지와 세트를 제공했다. 아사히는 현지 방송 인프라를 지원하고, 특히 오사카라는 거점 지역에서의 지원을 중점적으로 했다. 반면에 <2024 쇼균>은 일본이 아닌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 주로 촬영을 했고, 밴쿠버 섬의 우클루렛(Ucluelet)과 포트 무디(Port Moody) 그리고 영국에서 소규모 촬영이 이루어졌다. 오사카 성도 이곳에서 세트를 지어 촬영을 했다. 팬데믹이란 특수성도 있었지만 일본 내 촬영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 때문에 크레디트에 올라간 것은 영국 제작사인 DNAFilm이었다.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서 과거대비 현지 촬영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현지 지원 파트너 개념의 공동제작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것이다.
2. 더 일본적인 작품이다.
<1980 쇼군>은 철저히 미국 작가와 감독이 주도했다. IMDb 자료 기준, 일본인 참여는 캐스팅 디렉터인 Tatsuhiko Kuroiwa, 의상디자이너 Shin Nishida, 메이컵 Masato Abe 정도가 참여했고, 일부 현지 촬영 매니저로 참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2024 쇼군>의 경우 FX 소속의 일본인 감독인 Takeshi Fukunaga와 Hiromi Kamata가 연출가(Dirctors)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작가 중 한 명으로 Emily Yoshida가 참여했다. Aika Miyake는 에디터로 참여했다. 역설적으로 의상은 일본인 참가자가 없었다.
일본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작품이었던 탓인지 내용면에서도 <2024 쇼군>이 훨씬 더 일본적이다. 1980 버전은 제임스 클라벨의 소설에 충실했다. 일본 문화에 대한 묘사는 있었지만, 서구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윤색되고 각색되었다. 최신 VFX 기술 덕분에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의상, 건축 양식 등이 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1980 버전에서는 블랙쏜과 토라나가의 관계를 서구의 시각에서 조명한다. 예를 들어 블랙쏜이 할복 등 일본 전통문화를 접하면서 혼란과 충돌이 있지만 일본인의 감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2024 버전에서는 일본인 캐릭터들의 내면적 갈등과 정치적 복잡성이 더 깊이 다루어진다. 블랙쏜이 일본 문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블랙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겪는 심리적 변화 등도 깊게 다루고 있다.
1980 버전이 서구가 일본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면, 2024 버전은 일본인 캐리턱의 시각을 중심으로 두고 진행을 하기 때문에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의 감정과 관계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현지 촬영도 하지 않은 2024 쇼군이 더 농밀한 일본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밀도 높은 작품이 북미 시청자들이 수용했다. 에미상 18개 부문 수상은 이를 숫자로 증명한 것이다.
3. 언어 장벽이 줄어들었다
<1980 쇼균>은 사실상 영어를 기본으로 하고 상황 및 맥락 전달을 위해 일본어가 보조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으로 표류한 영국 출신의 항해사 존 블랙쏜(John Blackthorne)을 전면에 내세웠다. 처음 일본에 도착했으니, 일본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 문화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시청자에게 그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일본어 대사는 자막 없이 진행되었다. 필요하다면 작품 내 통역사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설명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2024년 쇼군>은 달랐다. 일단 주인공이 블랙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한 요시이 토라 나가(사나다 히로유키 분)가 전면에 등장했다. 전체 대사의 70%가 일본으로 진행되었고, 포르투칼어나 영어가 오히려 보조어로 쓰였다. 시청자는 자막을 통해 이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언어는 언제나 장벽이었다. 문화 역시 자본이 큰 곳에서 자본이 작은 곳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낮은 곳에 위치한 문화권은 항상 높은 곳의 언어를 수용할 준비와 자세를 갖추어야 했다. 그것이 더빙이 되었던 자막이 되었던 수용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높은 곳에 위치한 그들은 귀찮고 싫으면 내칠 뿐 불편함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2020년 봉준호의 기생충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인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자리에는 봉준호는 더 넓고 깊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서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애를 극복하라고 권고했었다.
영화의 세상에서는 영화라는 단일 언어만 있다고 강조한 그는
I think we use just one language, the Cinema.
"자막, 그 subtile의 장벽을,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권고하고 설파했었다.
Once you overcom the one-inch tall barrier of subtiles, you wil be introduced so many more amazing films
그러나 2022년 오징어 게임은 그 장벽이 이제는 더 이상 장벽이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마크 로손(Mark Lawson)은 오징어 게임이 자막이 있어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Shogun이 이를 확증했다고 평가했다. 여전히 자막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극복가능한 것이 되어 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00% 한국어였던 오징어 게임과 70% 일본어였던 쇼군의 성공에는 글로벌 스트리밍 사업자의 자막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1980 쇼군은 북미 지역에 한정된, 아시아와 일본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호기심에 가득 찬 북미인의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면, 2024 쇼군은 아시아에 정체성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세계가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아시아 문화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닐 수 있고
언어 장벽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면
오롯이 승부를 걸 수 있는 건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만듦새, 즉 제작역량이라고 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5개 국가 중 하나인 한국, 글로벌 플랫폼이 인정한 제작역량 보유국인 한국이 아시아의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을 아시아 국가의 여러 제작사들과 같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린 또 다른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구독은 사랑입니다!!!
사족. 이번 76회 에미상에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은 김그륜이다.
이번 에미상에서 '메인타이틀상'은 라스트오브어스(The Last of Us)가 차지했다. 이번 라스트오브어스의 메인타이틀은 디자인 스튜디오인 elastic에서 제작했고, 김그륜은 3D Animation & Compositing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