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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Dec 20. 2021

에세이 시험

생각의 과정을 잘 짓고 싶다.

에세이를 잘 쓰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에세이는 학교 과제에 제출하거나 시험으로 써내야 하는 에세이를 말한다. '아래로부터의 정치(Infrapolitics or Politics from below)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안티고네의 Parrhesia", "심의(Deliberative) 정치", "서벌턴(subaltern studies)'", "시민 운동(a social movement)" 등과 연관지어서 쓰시오.' 같은 정치학 기말 고사 에세이에 좋은 대답을 적어내고 싶었다. 소망과 달리 시험은 망한 것 같다. 


에세이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영어를 탓했다. 네이티브가 아닌 내게 분명 언어가 주는 장벽은 존재하지만, 에세이를 쓰면 쓸수록 문제가 언어에만 있는 것 같지가 않다. 한학기 동안 갖은 종류의 에세이 스물 여섯 개를 써내고 나서 내게 논리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나 자신에게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확신시키는 일은 쉽지만, 내 생각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읽는 이에게 그것을 잘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독자가 교수고 그가 읽어야할 에세이가 수백 편이고 나는 이제 막 아카데믹한 영어 에세이를 써보기 시작했다는 걸 감안하면 희망이 없어 보였다. 에세이에 관해서라면 뭘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다. 


블룸의 분류법(Bloom's taxonomy)을 알게 됐을 때 없던 희망이 조금 생겼다. 1956년에 벤자민 블룸이 그의 동료들과 교육 과정을 6단계로 나눠 소개한 분류법이라고 한다. 사회학 교수를 찾아갔을 때 내가 써낸 에세이를 앞에 두고 교수가 불룸의 분류법을 소개했다. '배운 걸 써내는 게 에세이 시험의 목적은 아니죠. 배운 것을 다른 경우에 적용하고 분석하고.. 결국에 자기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그는 내가 써낸 에세이의 서두를 잠깐 읽더니 차마 다 읽어볼 엄두가 안 난다는 듯 급하게 페이지를 덮어버렸다. '글쓰기 연습할 때 블룸의 분류법에 따라 써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블룸의 분류법대로라면 좋은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 먼저 배운 것들을 (1) "기억 및 이해(remember & undertaand)"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안티고네의 'Parrhesia'란 어떤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는 개념이 이미 머릿 속에 있어야 하고 그것을 끄집어내어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은 에세이란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 배운 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Application)'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크레온(왕)의 정의롭지 않은 법에 맞서 그것에 저항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오빠의 시체를 묻는 안티고네의 정의를 나는 타라나 벌크(Tarana Burke)가 이끈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에 적용했다. 


(3) 내 "생각의 과정(Thought process)"은 이랬다. 타라나 벌크는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들, 특히 인종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을 대상으로 계속해서 벌어지는 성폭행으로 힘겨워하는 주변 여성들을 목격했다. 벌크는 미투라는 글자를 적어 소셜 미디어에 나눴고 그를 계기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권력 및 남성 중심적 사회에 저항해서 진실을 말하고자 미투 운동을 이끌었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이라는 힘에 반항하여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행동한 게 시민 저항을 상징하듯이, 벌크가 시작한 미투 운동도 사회 권력에 맞서서 진실을 말하는 시민저항이라는 점에서 같은 문맥에 있다. 미투 운동과 같은 시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에만 권력을 위시해 임의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법을 세우는 힘을 가진 자들의 부정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러한 시민으로부터의, 아래로부터의 정치가 정치 시스템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때 여성 뿐만 아니라 다른 소외층들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더 노출될 수 있고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문제점이 다수의 독재라는 점을 생각할 때 힘없는 개인들이 모여 함께 목소리를 내는 시민 운동은 민주주의를 더 정당하게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는 식으로 나는 본문 하나를 마쳤다. 글을 읽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의 과정'을 따라올 수 있도록 그것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게 블룸이 말하는 '분석'이다. 내겐 가장 어렵고 그래서 가장 탐난다.


(4)'분석'을 마쳤다면 하나의 현상을 다른 현상(들)과 합성(Synthesis)해낼 수 있어야 한다. 실제 시험에서 나는 본문 1에서 타라나 벌크의 미투 운동이 권력 앞에 시민 저항이라는 점에서 안티고네와 맞닿아 있고, 그와 같은 사회 운동이 정의롭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힘으로써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본문 2에는 사회, 문화, 경제의 주류인 서양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서벌턴 연구의 시선을 따라 캐나다 사회를 백인 settler가 아닌 indeginous people의 시선으로 해석할 때, 그것 또한 정의롭지 않은 힘에 진실을 말하는 안티고네적인 시선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시민 운동과 서벌턴 연구 모두 권력 앞에 비권력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가 획득하는 정의를 상징한다고 썼다(본문 1 + 본문 2 = 비권력의 저항). 


(5)글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아이디어로 결론을 잘 매듭지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모자랐고 왠지 끝에 가서는 기운이 떨어져서 성급한 요약을 쓰고 에세이를 제출했다. 끝에 가서 내 생각이 게을러지지 않았더라면, 민주주의를 가장 잘 지켜내는 방법이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민주주의의 역설(Jill Lepore의 뉴욕타임즈 기사)를 빌려다가 비권력의 저항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민주적으로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결론 지었을 것 같다.   


대학 교육이 자본화되어 버렸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학 교육이라서 가능한 것들이 있다. 대학이 아닌 일상 생활에서는 논리적인 생각의 과정을 골똘히 가질 필요가 잘 생기지 않는다. 좀 논리적이고 싶다가도 생각하는 과정이 귀찮아져 쉬이 그만두게 된다. 학교 과제를 낼 때에는 매번 논리적이기를 그만뒀던 자리에서 더 나아가기를 요구받는다. 답을 고르는 오지선다형의 시험은 못쳐도 그만이지만, 에세이 과제에서 C를 받고 나면 내 사고력에 의심이 생기게 되고 다음 번엔 좀 더 잘 생각하고 싶어져서 애쓰게 된다. 내가 대학에 오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푸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UBC에서 받는 압박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A를 받는 게 궁극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생각의 과정을 잘 짓고 싶다. 혼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브런치를 쓰는 과정에서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됐다. 그러나 나는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블룸의 분류법을 알고나서 내가 느낀 부족함이 '생각의 과정'의 부족함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생각의 과정이란 것은 느긋하고 질서 정연할 때 생기지 않는다. 그건 아주 무질서하고 내 직관에 어긋나는 반론들을 계속해서 직면할 때 촘촘하게 생겨난다. 대부분의 경우에 공부라는 작용에는 그에 반하는 반작용들이 있을 때에만 능률이 최대로 오르는 것 같다.  잘짜인 생각의 과정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행인 건 누구나 연습을 하면 그 논리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Academic writing에 관한 책 몇 권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3주가 남았다. 꿀같은 방학이다. 셀프 비판은 종이 위에서만 하고 종이 바깥에서는 방학을 꿀처럼 보내기로 한다. 생각의 과정만큼 사는 과정도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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