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Dec 31. 2021

새롭게 생각하다(reimagine)

UBC에서 배운 것들

출처: 캐나다 한국일보

제인 젠슨(Jane Jenson)은 시민권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해진 국경 안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와 책임을 위임하며 완전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 젠슨의 정의에 비춰볼 때 캐나다 역사에서 원주민(Indigenous peoples)들은 그 완전한 자격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캐나다라는 나라가 원주민들의 땅과 삶을 빼앗은 식민지 역사에서 시작됐다는 걸 생각하면 애초부터 권리나 자격이라는 말은 원주민들과 너무 멀리 있다. 그들에겐 박탈이나 소외라는 단어가 더 가까운 말들이다.


조이스 그린(Joyce Green)은 원주민들의 시각에서 캐나다 정부의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문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캐나다 정부는 그 토대부터 원주민들의 땅을(땅에 살 권리를) 빼앗은 식민지의 역사다. 둘째, 폭력과 억압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식민지 정신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876년에 만들어진 인디언 액트(Indian act)를 통해 캐나다 정부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채 살아온 각기 다른 부족들(634개의 원주민 부족들, Metis와 Inuit을 포함시키면 더 많다)을 인디언이라는 명칭 하나로 동질화시켰다. 캐나다 정부는 자신들의 지배 구조를 원주민들 사회에 옮겨놓기 위하여 원주민 의회를 만들고 리더를 뽑는 일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며 원주민들을 통제했다. 원주민들은 정해진 곳(reserve)을 벗어나 살 수 없었고, 원주민들의 아이들은 모두 기숙사 학교(residential school)로 보내져 서양인(Western settlers)의 문화와 언어를 강제적으로 교육받았다.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와 전통은 억압당했고, 정부는 그들의 고유 의식을 잠재적 연대 수단으로 간주하고 법적으로 금지했다. 캐나다 정부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원주민 사람들은 알코올 섭취에까지 제한을 받는, 주체성과 정체성이 제거당한 어린아이들처럼 지배받았다.***


1969년 피에르 트루도(pierre trudeau) 정부가 제안한 화이트 페이퍼("white paper")도 인디언 액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트루도 정부는 원주민들을 자체적이고 고유한 집단으로 용인하는 대신 동화 정책을 폈다. 그에 원주민들이 반발하여 화이트 페이퍼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원주민들의 역사를 지우고 서양 개척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캐나다 정부의 노력은 이후로도 그치지 않았다.


출처: Castlegar News


안타까운 것은 21세기에도 시민권이라는 완전한 자격이 원주민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단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살고 있는 BC 주에서는 Wet'suwet'en 원주민들과 그들의 땅을 뚫어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려는 Coastal GasLink(기업) 사이의 갈등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일주일 전 뉴스에서 캐나다 연방 경찰(RCMP)이 자신들의 집을 지키는 원주민들을 강제적으로 구금하는 장면을 봤는데, 엊그제 뉴스는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은 언론인들마저 구금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캐나다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쪽을 선택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Wet'suwet'en 원주민들과 그들을 권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저스틴 트루도(justin trudeau) 정부는 캐나다 정부가 언제나 그래 왔듯 원주민들의 땅과 그들의 정치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지 못한다.


출처: Canada's History

올해 6월에 두 차례에 걸쳐 발견된 원주민 아이들의 무덤은 각각 215구와 751 구다. 두 학살 모두 예전의 기숙사 학교였던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캐나다의 진실 및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에 따르면 학교를 다니며 죽은 원주민 아이들이 대략 6000명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인디언 액트에 따라 강제적으로 학교에 끌려왔던 아이들은 정신적, 신체적, 성적 폭력에 시달리며 노동자로 이용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를 쓸 수 없었고, 기독교 교회의 종교를 주입받아야 했다. 원주민 소설가, 리처드 와가미즈(Richard wagamese)가 기숙사 학교를 다녔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 인디안 홀스(indian horse)를 읽은 적 있다. 소설 속에서 기숙사 학교는 원주민 아이들에게 배움의 장소가 아니었다. 억압과 공포의 감옥이었다. 목사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약탈했다. 나는 그의 소설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이었음이 드러나는 현실이 공포스럽다.  


원주민 아이들의 무더기 시신을 통해 더는 숨길 수 없는 캐나다 정부의 식민 정책이 탄로 나는 와중에 다른 한쪽에서 원주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있다. 캐나다라는 나라가 세워진 이후로 원주민들은 아직까지도 회복 없는 약탈을 겪고 있다.


약탈하는 자는 끝을 모른다. 최근에 들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원주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강제적 불임 수술이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와 앨버타주에서는 1970년대까지 "정신적인 결함"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원주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불임화 수술을 강제했다. 철저하게 인종 차별적인 악법이었다. 놀라운 것은 법이 폐지된 이후로도 2010년을 거쳐 2019년에까지 강제로 불임화를 당했다는 원주민 여성들의 제보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원주민들은 아직 시민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빼앗김은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시민권이라는 강력한 권리가 유럽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보호하고 포함해온 동안 원주민들을 철저히 소외시켜온 역사에서 그린(Green)은 시민권을 재상 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가 말하는 재상상이란 시민권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린은 시민권이 시민에게 주는 민주적 권리와 소속감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다. 그가 말하는 재상상이란 식민지 정책 아래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억압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 위에 굳건히 세워진 시민권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다. 시민권이라는 가장 완전한 권리를 취함으로써 사회 속에 확실히 포함된(include) 시민들의 시선이 아니라, 애초부터 권리를 빼앗기고 배제당해온(exclude) 원주민들의 시선에서 시민권을 새롭게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시민권이 정부가 시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정부와 시민의 관계임을 생각할 때, 원주민들은 시민권의 테두리 안으로, 그 관계 안으로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린은 진정한 화해(reconciliation)를 위해서 누가 주체가 될 것인지를 먼저 묻는다. 원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캐나다 정부에게 정당성을 주는 것이지, 캐나다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린의 주장이다. 언제나 캐나다 정부로부터 대상이 되어온 원주민들을 수동적인 시혜의 대상 자리에 묶어둘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먼저 주체가 되어 마땅히 요구해야 할 것을 더 소리 높여 요구하며 행동을 개시하는 쪽이 될 때 캐나다 정부의 시민권이 원주민들에게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법적 개념으로써 절대성을 풍기는 시민권은 국경 안에 어떤 사람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다른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킨다. 그것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격을 부여할 때 그것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듯 차별을 안긴다. 한 사회가 차별받는 자들의 시선을 입어보는 일을 포기하고 힘과 힘으로 만든 법을 맹목적으로 지지할 때 그 사회는 일부 권력층만을 위한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 안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 누구나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기는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일부 집단의 권리를 손쉽게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집단의 권리도 그만큼 쉽게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옳은 것 혹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들의 역사에는 숨겨진 폭력과 배제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다. 법은 힘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힘이 정의롭지 못할 때는 재상상되어야 하고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때 그것을 먼저 재상상하는 주체가 원주민들이라면 원주민들을 따라 잘못된 법을 함께 재정의하는 것이 캐나다 사람들의 몫이다. 젠슨은 시민권이 시민과 국가 사이의 관계라는 법적 개념을 넘어 또한 "지지와 연대를 바탕으로 한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로 형성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자신들의 언어로 되찾는 과정에서 캐나다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가 두텁게 이어지는 상상은 캐나다가 팔로워가 되어야 한다는 그린의 시선만큼 내겐 해방적이다.


주체성에 대한 그린의 질문은 내게 원주민과 함께 다른 집단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 힘센 존재들이 팔로워가 되고, 팔로워일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존재들이 주체가 되는 상상이 캐나다에만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난민들이 난민이 되기 이전에 가졌던 정체성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을 난민들이라 부르며 수동적 대상으로밖에는 여기지 못하는 시선에도, 비장애인인 채 살아가는 게 익숙해져 버려서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권리가 아닌 시혜로 생각해버리는 무식함에도, 부(父) 아래에 종속되어 살아온 여성들의 역사를 듣는 일이 함께 사는 방법이 아닌 다른 한쪽이 힘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는 편협함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눈여겨보는 대신 가난이 게으름 혹은 멍청함 때문이라는 짧은 판단에도, 오로지 인간들의 밥상 위에 놓이기 위하여 태어나고 죽는, 잔인하게 도살당하는 동물들을 생각하는 일에도,


출처: The Hans India

힘이 없어서 자꾸만 작아져야 하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 새롭게 생각해보는 일이, 재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언어로 말할 기회를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다시 해석하는 시도들이 있을 때에만 다음 세대들도 인간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하다고, 좀 더 살 만하게 만들어보자고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진보하는 일이 실리콘 밸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 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시선을 빌려보며, 약한 것들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면서 가능해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진보란 그런 것이다.  



 

*Jenson, Jane. "Introduction: Thinking about citizenship and Law in an Era of Change, " in Law Commission of Canada(ed.), Law and citizenship, Vancouver: UBC Press, 2006.


**Green, Joyce.  "The Impossibility of Citizenship Liberation for Indigenous People, " in Jatinder Mann(ed.), Citizenship in Transnational perspective, New York: Palgrave Macmilan, 2017.


***

https://indigenousfoundations.arts.ubc.ca/the_indian_act/



****

https://canadians.org/analysis/five-things-you-should-know-about-wetsuwetens-fight-their-rights


        

작가의 이전글 네 이름은 신자유주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