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는 미녀의 알몸이 보고 싶다
왕이 되고 싶은 아버지들에게
안젤라 카터 버전의 <미녀와 야수>를 읽었다. <타이거씨의 신부(The Tiger's Bride)>에서 미녀의 아버지는 도박에서 지자 미녀를 야수에게 판다. 미녀를 얻게 된 야수가 미녀에게서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그는 미녀의 알몸이 보고 싶다. 야수에게 팔리는 순간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미녀지만, 그와 동시에 미녀는 자신의 신분을—비천한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 질 낮은 노동자가 아닌 숙녀라는 신분을—되새기며 야수의 제안을 수정하려 한다. 미녀는 야수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얼굴을 포함한 상반신만은 가리게 해달라고 야수에게 부탁한다. 미녀의 제안은 남성이 여성을 사고팔 수 있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의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자본화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여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신과 몸을 나누는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도 드러낸다.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높은 계급과 노동자층, 정신과 몸을 나누고 차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뚜렷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의 핵심 법칙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철저한 위계질서는 자연법이 되었다.
미녀의 판단과 다르게 야수에게 미녀의 알몸은 관음도 에로틱도 아니다. 야수가 미녀의 알몸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그녀와의 '호혜적 관계'다. 다시 말해, 야수는 인간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어떤 위계도 없이 알몸 대 알몸으로 상대방이 가진 고유한 질서를 수용할 수 있는 관계를 꿈꾼다. 그러므로 미녀에게 알몸을 보여달라는 야수의 제안은 인간이 동물을 억압하고 남성이 여성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그 사회가 투사하는 시선을 함께 벗어나자는 제안이다. 야수의 속뜻을 알리 없는 미녀에게 야수는 인간과 철저히 다른, 어쩌다 돈이 많아 자신을 사게 된 동물일 뿐이다. 비록 팔려오는 존재지만 자신이 신분 있는 가문의 아가씨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 미녀에게 야수의 제안은 그저 수치스럽다. 미녀는 자신이 야수를 위해 춤춰줄 수 있는 여자('a ballet girl')가 아닌 성녀('a woman of honour')라는 것을 거듭 명심한다.
알몸에 대한 두 존재의 해석 차이는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야수는 그의 제안이 실패하자 미녀에게 그녀와 똑 닮은 인형을 선물한다. 기계처럼 움직이고 말하는 인형을 보며 아버지의 세계 속에 길들여진 채 자란 자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미녀의 세계는 조금씩 균열한다.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다름(otherness)을 발견하게 된 미녀는 야수가 가진 다름의 질서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이 되지 못한 열등한 존재로 야수를 판단하는 대신 타이거라는 야수로 그를 바라본다.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입어야 했던 모든 가면을 벗고 먼저 야수가 알몸을 내보였을 때 미녀 또한 자신의 알몸을 그 앞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미녀는 생애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고, 자유를 맛본 미녀는 이제 아버지에게 돌아가도 좋다는 야수의 허락을 거부하고 대신 야수의 방문을 두드린다. 더 이상 인간의 탈을 쓰지 않은, 으르렁대는 야수 앞에서 미녀는 다시 나체로 선다. 그의 애무를 달콤하게 느끼고 자신에게 돋아난 털 위에 떨어지는 그의 침방울들을 느낀다.
<타이거의 신부>의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내가 흥분했던 이유는 그들의 애무가 도발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부장적 질서를 벗은 뒤 자신의 자유와 욕망을 발견한 미녀가 먼저 야수를 찾아간다는 설정과 그리하여 두 존재가 위계질서 대신 서로가 가진 고유한 질서를 포옹하게 되는 결말은 해방적이다. 해방감이 나를 흥분시켰다. 안젤라 카터가 쓴 이야기들은 아주 자주 마법적인 배경 속에서 펼쳐지고 <타이거의 신부>에서도 타이거가 사는 성은 마법의 성(magical kingdom)으로 묘사된다. 알몸을 보여달라는 자신의 제안이 미녀에게서 거절당한 이후 타이거가 흘리는 눈물은 다이아몬드로 변하고, 타이거의 성에서 미녀는 시간 감각을 잃는다. 미녀는 거울을 통해 제물을 받고 좋아하는 아버지의 위선을 쳐다볼 수 있고, 그녀가 걸쳐 입은 망토는 어느새 쥐로 변해 달아난다. 카터에게 이러한 마법의 세계가 필요한 이유는 마법이 아닌 세계에서 존재하는 철저한 이분법과 절대적인 믿음들이 휘어질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처음 <타이거의 신부>를 읽고 이야기의 끝을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도 가부장에 스며든 채 오래 살아온 내게 들러붙은 이분법적인 사고의 한계 때문 아닐까. 이야기는 미녀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였고, 나는 미녀의 시선을 따라 타이거의 제안에 불쾌해했다. 그의 제안을 관음적 시선 이상으로 읽지 못했다. 이야기의 끝에 등장하는 두 존재의 동물적인 애무와 미녀에게 돋아는 아름다운 털('beautiful fur')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리기에는 내가 가진 성적, 사회적, 규범적 시선의 한계가 너무 두꺼웠던 것 같다.
미녀는 타이거를 만나서 아름다운 털—자신만의 욕망—을 발견하게 되고, 타이거는 미녀를 만나 생애 처음으로 인간 앞에서 열등하지 않은 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둘은 서로의 시선을 빌려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둘의 마주봄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벗어난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게 카터 버전의 미녀와 야수는 위계가 멸망하고 개개인이 욕망을 되찾는 마법적 세상을 여는 키로서 호혜성의 원리를 제시하는 이야기다. <타이거의 신부> 뿐만 아니라 그녀가 각색한 다른 동화들을 읽는 일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공간의 표준값이여 온 가부장의 역사가 내게 드리운 인식적 한계를 부수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두 사람에게 안젤라 카터의 동화집을 권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들 인식의 한계를 혹은 게으름을 쳐다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그들도 위계 대신 호혜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엿봤으면 좋겠다. 한 사람은 내가 사는 집 안에서 왕이 되고 싶은 남자고, 다른 한 사람은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한 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는 남자다.
밤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빠의 큰소리를 두고 날아(직장 때문에 잠시 부모님 집에 함께 거주 중인 사촌 여동생)가 자고 있으니 조용히 말하라는 엄마의 주의가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내 집에서 내가 애 눈치를 봐야 하냐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참다못한 동생이 방문을 열고 나가 그만 좀 하시라는 것을 시작으로 아빠와 동생의 싸움이 시작됐다. 지지 않고 달려드는 동생의 용감함에 기겁한 아빠가 선택한 어휘는 '좆만 한 게'였다. '좇만한 게 까불지 마!'
화가 나면 곧잘 뭘 집어던지는 아빠가 이번에 집어던진 건 자기 핸드폰이었다. 집을 나가라는 아빠의 욕설과 고함, 날아오는 핸드폰을 피해 동생은 자기 이모(우리 엄마)와 함께 집 근처 호텔로 피신했다. 피신처에서 내게 상황을 전달하는 동생에게 나는 하루빨리 살 곳을 구해 집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동생은 이모는 어쩌냐고 물어왔다.
아빠는 엄마에게 왕처럼 굴고 엄마는 아빠 앞에서 신하가 (더 정확하게 시녀가) 된다. 그들의 관계를, 그리고 내 앞에서 마저 왕놀이를 하고 싶어 하던 아빠의 꼴을 견디지 못한 나는 스물둘이 되는 해에 집을 나왔다. 이후로 아빠의 왕놀이를 견뎌야 하는 사람은 엄마 혼자가 됐다. 너희 아빠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래도 성질을 많이 죽이고 산다, 고 은근슬쩍 아빠 편을 드는 엄마 말을 믿고 정말 아빠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아주 알량하고 작은 권력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아빠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왕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 엄마에게 밥상을 요구하고, 자기 술주정의 받침대를 요구하고, 심지어 작아지는 자기 자아까지 엄마에게서 회복받고 싶어 한다. 세상이 그의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안의 질서만큼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아빠는 '내' 집에서는 내 마음대로 소리 칠 수 있고(그곳은 정말 그의 집일까. '우리'의 집이 여야지 않나) 좇만한 게 까분다고 생각되어 핸드폰을 냅다 던질 수 있다. 그곳에서는 그가 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를 대접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빠가 그의 자아를 어디서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지 의문이고 걱정이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빠가 윤석열을 뽑은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아빠에게 권력이란 부패해도 괜찮은 것이다. 부패할지 언정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면 가치롭다고 그는 생각한다. 매를 들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게 (좆만 한) 어린것들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함치지 않으면 작은 것들의 복종을 얻을 수 없을 거라고 그는 믿는다.
지금까지 윤석열 당선자가 발표한 내각 인선이 '서육남(서울대 육십 대 남자)'라는 비판에 대해 당선자는 각 분야에서 '최고 경륜과 실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았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시사인, '이들을 보라, 이들이 메시지다'). 당선자가 뽑은 대부분의 정계 후보자들이 부정부패와 비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가운데 나는 혹시 그가 말하는 최고 경륜과 실력이란 기성 권력이 부정 권력을 거듭 재창출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선자가 여성 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그 이유로서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차별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가 과연 '차별'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감수성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든다. 당선자가 발표한 내각 인선의 84.2%가 남성인 것은 그에게 성차별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능력주의로 포장 가능하다. 모든 것을 능력주의로 묶어버리는 프레임의 야만성을 그는 들여다볼 수 없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김누리 교수는 한겨레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20대 대선은) 한국 교육의 파탄을 보여주었다. 이번 대선은 한국 교육에 가장 잘 적응한 자와 가장 먼 우회로를 걸어온 자의 대결이었다. 한국 교육이 키워낸 최고의 엘리트들이 보여준 반지성과 몰상식, 시대착오적 사고는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교실이 얼마나 미성숙한 엘리트들을 길러왔는지 이번 대선은 선연히 보여주었다.'
대선 결과 이전의 각종 매체와 후보자 토론에서부터 당선자는 정의에 대한 무지함과 공정에 대한 무감각을 곧잘 드러내 왔다. 그가 상상하는 세상에서는 최저 임금보다 적은 돈을 받고도 일할 사람들이 넘쳐나고, 전두환은 정치를 잘한 대통령이 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없었던 일이 되고, 북한에겐 선제타격으로 대응하면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에 접근할 수 없는 게 당연하고, 저출산과 남녀 갈등은 페미니즘이 일으킨 문제가 된다. 내게 윤석열 당선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하여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성의 힘을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후보자였다. 일개 국민인 내가 그의 말을 마주하고 받은 인상이란 권력을 가진 자의 굳은 뇌와 마음뿐이었다. 공감과 논리 대신 힘과 통치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려는 그의 태도는 대한민국에서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이 공유하는 지적 버블의 상스러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당선자가 내뱉은 실언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 집의 왕과 한 나라의 왕이 되려는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는다. 그들은 자기 앞의 존재들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을 줄 모른다. 아빠에게 사촌 동생이 좆만 한 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당선자가 국민을 바라보는 시선도 오만하고 폭력적인 시선일까 봐 두렵다.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democracy"는 그리스어 dēmos (“people”)와 kratos (“rule”) 에서 온 말로 직역하면 사람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한 사람의 독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에 의한 정치가 민주주의 정신의 근본인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에도 가정에도 민주주의가 없다. 아빠가 집 안에서 왕 짓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석열 당선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도 엄연히 국민을 대신하여 일하는 직업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 같다. 그들이 민주적일 수 없는 이유를 나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위계질서에서 찾는다. 한국 사회에서 상명하복의 문화는 일종의 도덕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빠는 좆만 하거나 조그마한 것들이 까불면 화가 나고, 그래서 윤석열 당선자는 자신의 권력이 내리는 명령을 답이라고 확신하는 한편 작은 존재들은 전혀 보지 못한다. 그들은 호혜적인 관계를 경험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마주한 자의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서 먼저 옷을 벗는 타이거 씨의 이야기를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의 권력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상대가 존재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아무런 위계를 가지지 않고도 공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어볼 여력이 대체 없다.
우리는 <타이거씨의 신부>에 나오는 마법의 성에 살지 않는다. 왕이 되고 싶은 아버지들의 세계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의 모든 좆만 하고 조그만 것들에게 나는 우리가 먼저 옷을 벗자고 제안하고 싶다. 힘과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벗고 나의 자유와 욕망을 위해서 큰소리로 떠들자고 말하고 싶다. 그리하여 작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대안적인 세계들이 마법처럼 생겨나는 현실을 꿈꾸고 싶다. 거기서 엄마라는 여성은 야수처럼 난폭한 남편을 인간으로 탈바꿈시켜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고, 딸이라는 여성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야수의 성에 들어가는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거기서 여성은 예쁘고 착하고 고울 필요 없이 가부장을 벗어난 욕망과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야수의 방문을 두드릴 수 있고 야수를 야수로서 바라볼 수 있다. 미녀가 미녀이고 야수가 야수이고 내가 나고 아버지가 아버지고 대통령이 대통령인 채 서로를 억압 없이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세계는 어쩌면 가장 좆만 한 것들이 까불어댈 때 만들질 세계일지도 모른다.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은 것들의 발광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