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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Mar 11. 2020

나는 왜 이직왕 떠돌이가 되었는가?

파란만장한 역마살과 함께 살아온 한 남자의 솔직한 이야기

10번의 이직과 2번의 사업
그리고 뮤지션과 프리랜서.

난 그렇게 스스로
이직왕 떠돌이가 되었다.



1. 언더그라운드 힙합 뮤지션 / 1998년 4월 클럽 마스터플랜 데뷔


나의 첫 직업은 언더라운드  힙합 뮤지션이었다. 굳이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은 이 시절을 포함시킬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내 역마살의 시작점이었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나는 일찌감치 18살 고등학생 때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에 뛰어든 1세대 래퍼였다. 어릴 적 친구였던 디지, 비니와 함께 셋이 RIOTA라는 팀을 만들어 공연하겠다고 신촌역 8번 출구를 나와 찾아간 곳이 운 좋게도 당시 언더그라운드 힙합씬이 만들어지던 훗날 한국 힙합의 성지라 불리게 되었던 마스터플랜이라는 곳이었다.


2.CB MASS / CB + MASS - 나  


팀의 리더였던 디지가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 같은 클럽에서 공연하던 커빈형의 제의로 친구 비니와 합류하면서 CB MASS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여담으로 비니와 나는 팀 이름을 MASS라고 지었지만 우리의 첫 공연에 적힌 팀이름은 CB MASS라는 이름이 적혀 있어 리더였던 커빈형에게 물어보니 커빈 집단이라는 의미로 본인의 이름 약자인 CB를 붙여 CB(커빈) MASS(무리)라고 했다. 이렇듯 나이가 많고 직접 곡을 쓰는 독보적 리더의 권력을 바탕으로 팀이름조차 팀원들과 상의하지 않는 독단적인 리더의 일부가 되기에 나는 그리 고분고분한 성향은 못 되었고 결국 언더그라운드에서만 활동하다 커빈형과의 성격차이로 가장 먼저 팀을 탈퇴하게 된다. 


이후 이 팀은 비슷한 이유로 정말 많은 멤버들이 교체되었고 컴필 앨범 '2000 대한민국' 참여와 함께 메이저에 데뷔하며 결국 대중 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팀이 된다. 이 팀의 마지막 멤버들이 탈퇴한 뒤 만든 팀은 '다이나믹 듀오'라는 한국 힙합의 전설이 되기도 한다.


3. PDPB / 한국에 돌아온 디지와의 재 결합


CB MASS를 탈퇴했을 무렵 때 마침 한국으로 돌아온 디지와 다시  PDPB라는 팀을 결성하게 된다. 이 팀의 멤버로 Pe2ny 형과 만두, 미스티 등이 합류하고 훗날 최고가 된 솔스케이프 형이 객원 DJ로 활동하게 된다. 이 팀을 아는 사람들은 당시에 직접 공연을 봤던 골수 힙합팬들일 수밖에 없는데 리더였던 자타공인 'insane'디지의 성향이 전적으로 반영되어 당시 '엽기'라는 키워드의 이미지를 가진 팀이었고 차분하고 진지한 성향을 가진 나와는 물과 기름같이 섞이기 어려웠기에 얼마 간의 활동 후 탈퇴를 결정하게 된다.


4. 822 / 서울을 대표하는 크루


그 사이 CB MASS를 탈퇴한 비니와 Make-1형 그리고 2MC라는 팀을 해체한 Leo Kekoa형과 어울리며 822라는 크루를 만들게 되었다. 822는 대한민국의 국가번호 082와 서울의 지역번호 02에서 0을 빼 만든 이름으로 대한민국 서울을 대표하는 크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색이 강한 힙합 음악을 하는 크루로서 굉장히 자신 만만한 틀림없이 멋들어진 이름이었다.


비슷한 시기 당시 솔로 활동 중이던 주석이 형이 나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해와 나는 주석이형을 822로 소개해 크루에 합류하게 되고 크루 내에서 가장 형이었고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금세 리더가 되며 크루를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위계질서가 강했던 터라 막내였던 나는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그리고 또 밝히기 조심스러운 이유들로 결국 또 탈퇴하게 된다. 이후 822는 금세 힙합신을 대표하는 크루로 자리매김하고 나는 그 모습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는 고독한 시간을 갖게 된다. 


5. MC신건 / 홀로서기 그리고 입대와 1집 앨범 발매


그렇게 여러 팀들을 거치며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던 나는 독립적으로 솔로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이전에는 능력이 부족해 팀에 속해 있어야 했지만 다행히 주변 형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전에 속해 있었던 팀들처럼 큰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수많은 무대를 혼자 책임졌고 마침내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나의 첫 정규 앨범 'Lyricist'를 제작하게 된다. 


당시 역사적인 클럽 마스터플랜은 문을 닫고 레이블을 설립하고 있었으며 나는 어느새 군입대를 할 나이가 되었다. 입대  전에 앨범 준비를 겨우 마치고 내가 입대해 훈련소에 있었던 상태에서 앨범은 발매되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기갑으로 주특기를 할당받고 상무대라는 곳으로 후반기 교육을 갔을 2002년 월드컵이 한창 난리였던 당시 우편을 통해 힙합 커뮤니티 플랫폼이었던 힙합플레이야의 앨범 순위에서 잠시 1위에 올랐던 화면을 프린트한 종이와 함께 CD를 받고 혼자서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도 아마 당시 래퍼 중 제가 막내였지만 모두가 방위 아니면 면제였고 내가 1호 현역 입대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군대를 기피할 편법도 존재했던 것 같지만 나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당당히 입대를 선택하게 되었다. 군 생활 당시에는 하루에도 수 백번씩 후회했지만 제대 후 평생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내가 쓰는 정당함을 얘기하는 가사들을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었기에 입대를 후회하지 않고 여전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6. DOKKEBEEZ / 전역 후의 활동 재개


군생활 동안 언더그라운드에서 같이 공연하던 동료들이 TV 음악프로에 나오는 모습을 내무반에서 지켜보며 짓궂은 고참들은 그때마다 나에게 랩을 시키는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힙합은 많이 대중화되어 있었고 민간인이 된 나는 다시 음악을 해야 했다. 그 사이 822 크루는 해체되었고 그중 가장 잘 맞았던 리오 형이 만든 도깨비즈라는 크루에 들어가게 된다. 크고 작은 많은 공연들에 참여하며 사회에 적응해 가던 시기였고 추후 학교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며 크루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7. 첫 번째 입사 / 복학 전 회사 체험


복학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음악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어 잠시 일을 해야 했다. 페덱스 킨코스라는 곳에 계약직으로 합격이 되었고 신입사원 평가 기간 동안 1등을 하며 본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소중한 첫 회사 생활이었고 학교 복학을 위해 짧게 근무한 후 첫 번째 퇴사를 하게 된다.


8. 디자인 회사 / 첫 취업


졸업 후 경제적으로도 자립을 해야 했기에 부모님의 바람대로 음악이 아닌 취업을 하게 된다. 신사동에 있는 디자인 회사 겸 사진 스튜디오를 하고 있는 작은 회사였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회사와 사우나에서 자면서 철야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할 때는 월요일에 출근해 금요일에 집에 가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지금과는 다른 문화의 극한 격무에 시달리다 당시 군대에서 전역한 친구와 팀을 만들어 다시 음악을 하기 위해 퇴사하게 된다.


9. NE STYLE / 짧고 강렬했던 기억. 그리고 운명의 장난


퇴사 후 친구였던 자건과 의기투합하여 NE STYLE이라는 팀을 만들었고 유명 뮤지션의 매니저분이 만든 기획사와 처음으로 계약을 하고 앨범 준비를 하게 된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으나 그러던 중 기획사의 내부 사정으로 음악사업을 접게 되었고 우리의 앨범 역시 중단되어야 했다. 고민 끝에 결국 모아둔 월급을 투자해 기어이 준비하던 앨범을 발매한다. 반응도 괜찮았고 야심 차게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친구의 사정으로 팀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결국 앨범 활동은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좌절하고 방황하게 된다. 


10. 음악 유통사 - 슬럼프 극복 디지털 음악 산업으로의 출입


그렇게 한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친구들과 음식 장사를 준비하기도 했지만 내 상황상 더 늦기 전에 회사를 들어가야 했다. 이왕이면 음악 사업을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킹핀엔터테인먼트라는 음악 유통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국에 유료 음원사이트와 디지털 음악 유통이 자리 잡던 초창기였기에 음악 마케팅 일을 하며 온라인 음악 시장에 대해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가수들의 음악을 마케팅하며 뒷전에 두었던 내 음악들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앨범을 내보고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결국 퇴사를 선택하게 된다. 


11. 첫 번째 창업 - 스트릿 문화와 디자인 회사. 멀고도 험한 사업의 길


새로운 앨범 준비를 하며 자유롭게 일하기 위해 회사를 퇴사하고 친한 형과 공동으로 창업을 한다. 스트릿 문화 커뮤니티 플랫폼을 먼저 시작했지만 직원이 늘어나며 자금을 충당해야 했기에 음악 관련 많은 디자인 일들을 하게 된다. 주로 지인들이었던 거래처들의 부탁으로 적합한 금액을 받으며 일하지 못했고 덕분에 일은 많았지만 매출은 많지 않은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고 틈틈이 새로운 앨범 준비를 하게 된다. 


12. 신건 - 대중적 시도를 통한 신생 레이블과의 계약 그리고 희망과 절망


음악 유통 일을 하며 외골수적이었던 저의 음악 취향이 바뀌었고 대중음악의 장점을 느껴 조금 더 대중적인 음악을 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소규모의 기획사 대신 제 의견이 많이 반영될 수 있는 신생 기획사와 계약하여 당시 유명 보컬들과 콜라보 한 Love&Hate 프로젝트 앨범 시리즈들을 발매하게 된다. 


애즈원 누나들과 함께한 첫 싱글 'My Girl'의 성적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고 드디어 내가 잘 되나 보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김현정 누님과 함께한 두 번째 싱글 '사랑에 지치다' 발매 전 당시 유명 음악프로 출연을 앞두고 PD 로비 사건이 터지며 출연이 불발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신호 대기 중 다른 차량에 치여 입원하게 되며 아무런 홍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앨범을 접게 된다. 


많은 실망감이 들었지만 절치부심해 J 누나와 세 번째 싱글 'Bye Bye'를 발매하고 문승재 감독님과 함께한 CG를 활용 뮤직비디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다시 좋은 흐름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다음 싱글을 준비하던 중 소속사에 문제가 생기고 앨범을 더는 진행 할 수 없게 되며 한 푼의 정산도 받지 못한 채 앨범에 대한 권리마저 양보하며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 소원이었던 온전한 활동 한번 해보지 못하고 또다시 깊은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13. 프리랜서 / 혼자 걸어가는 길


그동안의 노력이 다시 수포로 돌아가 자포자기하게 되고 공동 대표로 진행하던 사업도 포기한 채 논현동 옥탑방을 얻어 한동안 집에 처박혀 있게 된다. 더 이상 돈도 희망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가 29살이었는데 지독한 아홉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던지 음악 관련 웹디자인, 앨범 커버 디자인 등의 의뢰가 꾸준히 들어오며 하나둘씩 하다 보니 어느새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14. 1인 레이블 / 삼십 대의 시작


프리랜서 일이 잘 되며 경제력과 자존감을 회복하자 가장 먼저 마무리하지 못했던 Love & Hate 앨범 프로젝트를 혼자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심히 디자인해서 번 돈으로 다시 앨범을 제작하게 되고 태완(C-Luv) 형과 제이스가 함께한 '가슴에 묻다'와 박정은 님이 함께 해 주신 시리즈 마지막 싱글 'Love Dictionary'까지 무사히 발매를 하며 잘 마무리하게 된다.  그 외에  '키스미 달링' , '이 또한 지나가리라'등 몇 개의 싱글을 발매했고 음원 매출이 많지 않아 심한 적자를 보며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열심히 만들었던 앨범들이었기에 후회는 남아있지 않는다.


여담으로 그중 야구선수 양준혁 선수의 은퇴 헌정곡 '위풍당당 양신'을 발매한 적이 있는데 실제 양준혁 선수의 은퇴식 방송에 주제곡으로 쓰이고 훗날 양준혁 선수에게 전화가 와 직접 만나 뵙고 감사 인사도 받는 등 잊지 못할 보람 있는 일들도 있었다.


15. KMP Holdings  / 돈 대신 선택한 K-POP의 성장기 경험


그러던 중 지인에게 새로 생긴 회사에 추천을 받게 된다. 급여 조건은 프리랜서 벌이의 반절도 안됐기에 고민을 했지만 새로운 경험과 면접을 보셨던 팀장님과의 대화에서 신뢰를 느껴 입사를 결정했다.


당시 3대 기획사인 SM, YG, JYP 등 7개 기획사의 합작법인이었던 KMP라는 회사였고 저는 이 회사들에서 발매하는 앨범들의 유통 및 마케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막강했던 콘텐츠 파워로 회사의 성장은 순조로웠으나 소수 정예의 구성이었기에 일은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멀티적인 역할이 필요했었다. 그런 면에서 나한테는 제격인 일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빅뱅, 싸이, 소녀시대, 원더걸스, 2NE1, miss A, EXO 등 정말 유명한 앨범들을 많이 담당하며 좋은 경험들을 쌓았고 실무적으로도 배울 것이 많았기에 애초에 1년 정도의 경험만 쌓아 보자라고 생각했지만 열심히 하다 보니 2년이나 다녀 버리고 말았다. 


얼마 후 kt music과 'genie'라는 음악 서비스를 만들며 합병이 되었지만 큰 조직의 경직된 문화와 합병으로 인한 텃세에 거부감을 느꼈고 내 레이블을 설립하고자 했던 계획과 맛 물리며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목표대로 genie는 금세 업계 2위로 자리 잡으며 현재까지 잘 서비스되고 있고 나는 씨앗을 뿌리고 열매의 단 맛을 느껴보기도 못한 채 다시 레이블을 설립하고 무모한 도전에 나서며 스스로 고된 길을 걷게 된다.


16. Fair music / 무모한 도전


페어 뮤직이라는 레이블을 설립하고 제작자로서의 일에 집중하게 된다. 'ODD EYE'라는 여성 3인조 크로스오버 팀과 'Melodian'이라는 2인조 남자 듀오의 앨범을 제작하게 되는데 두 팀 모두 대중적에 가깝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팀들이었고 당장 수익이 날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티스트가 알려지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으나 결국 자본금의 부족으로 버티기에 실패하고 만다.


이 시기쯤 K-POP 전문 인력 해외 연수단에 선정되어 뉴욕을 방문하게 되고 Google, MTV, Spotify, BMI 등의 현지의 음악 기업들 견학과 CMJ Music Marathon 등을 경험하며 신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미국병에 걸리게 된 계기였는데 당시 한국의 조직에서 느꼈던 숨 막혔던 답답함과 달리 일하는 방식과 문화, 생각하는 방향이 상상해 오던 그것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으로 큰 울림을 받게 된 것 같다. 


17. 여행 / 떠돌아다니기


레이블을 하며 많은 경험도 남았지만 많은 대출금도 남게 되었다. 여러 복합적 요소들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며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되고 몇 달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방구석에 갇히게 된다. 그러던 중 돈은 없어도 시간은 있는 순간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무작정 미국 여행을 떠나게 되고 지인들이 살고 있던 LA, SF, Austin, NY, Hawaii를 한 달 정도 떠돌며 궁금했던 미국을 천천히 둘러보고 언젠가 이곳에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채 돌아오게 된다. 


18. 바음협 / 선택의 갈림길과 비 일반적 선택


여행 후 심신이 조금은 회복된 상태에서 kt music으로의 복귀 제안과 동시에 현 음악 정책의 대안을 만들기 위한 바른음원협동조합이라는 단체에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대기업 v/s 신생단체. 어쩌면 간단한 선택일 수 있으나 kt music으로의 복귀 제안은 제가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고생만 하고 나가 방황하는 제가 안쓰러워 보였던 선배들의 배려라 생각했고 나를 더 필요로 했고 내가 더 중요한 부분을 맡을 수 있다고 느꼈던 바음협을 선택하게 된다.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를 선택한 격이었다.

 

시나위 출신의 신대철 이사장님을 도우며 우리가 가진 음악 정책의 불공정성에 대해 알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언론과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고 적어도 이러한 문제들을 수면 위로 꺼내 개선하는 일에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담으로 중간에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견학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Linkedin, facebook, google, UBER 등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기업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한국의 조직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커져 갔던 시기였다.


19. KOSCAP / 한국의 두 번째 음악 저작권 협회 그리고 신생 단체의 어려움


역시 바음협 활동은 뜻깊었으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한계가 있었고 생계가 위험해지기 시작할 때쯤 때 마침 새로 생긴 한국의 음악 저작권 복수 단체인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에서 제안을 받고 적을 옮기게 된다. 바음협이 주장하던 음악 권리자들을 위한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새로운 단체의 숙명처럼 경영적인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며 또다시 생계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20. 겸임 교수 / 뮤직 비즈니스 


KOSCAP 근무 시기와 겹쳐 두 학교의 실용음악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뮤직 비즈니스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고 음악인들의 음악 정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중요하다고 느끼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다. 음악만 하며 여러 가지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내 경험들을 되짚으며 음악 강의가 아닌 음악산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재미는 없지만 필요했던 내용들을 학생들에게 최대한 전달해 주려 했었다.


21. 중국 취업 / 베이징에서의 짧은 기억


결국 KOSCAP 퇴사를 고민할 때 kt music의 복귀 제안을 다시 받고 면접도 마무리하였지만 아쉽게도 직급과 급여 등의 조건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다. 작지 않은 회사들은 내부 가이드라인이 명확하기에 그곳의 형평성을 무너트리면서 까지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그 외 4곳 정도의 회사에서 제안을 받게 되고 그중 중국에서 한국의 음악을 유통하는 회사로 국제 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다른 회사들과도 함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한국을 떠나서 일해 본다는 새로움에 설레었던 것 같다. 이전까지 여행 한번 해본 적 없는 나라로 날아가 삶의 터전까지 바뀌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경험과 맞닥뜨리는 것을 즐기기에 많은 고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은 생각보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고 회사가 있던 베이징에 가서 15억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음악을 알리고 권리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나 당시 한국과 중국을 뒤흔들었던 사드(THAAD) 문제로 문화계는 직격탄을 맞았고 중국의 조직문화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아쉬움을 접고 짧은 중국 생활을 정리 후 귀국하고 말았다.


22. 미국행 / 아메리칸드림, 뜬구름을 잡다


한국으로 돌아와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막연히 바라왔던 미국에서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해외에 한국 음악을 유통하는 회사와 반 계약직 형식으로 파견 근무를 협의하고 텍사스 오스틴으로 떠났다.

오스틴으로 간 이유는 사촌들이 살고 있는 도시였고 세계 3대 음악 페스티벌인 SXSW가 개최되는 미국의 유명한 라이브 음악 도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방문했을 당시 좋은 느낌을 받았던 영향도 작지 않았다. 영어가 많이 부족했기에 당장 영어 공부부터 해야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에서의 취업이 목표였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새로움의 연속이었고 사촌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지만 취업은 사실상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가진 조건으로는 더욱 그러했고 실제로 취업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굉장히 유명하거나 IT 계열의 인재였던가 아니면 미국에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아주 적은 가능성에 희망을 가지고 방법을 찾고 있었고 그러던 중 마침 한국에서의 경력을 잘 살려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음악 회사와 알게 되었다. 몇 달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한 끝에 능력을 테스트받고 신뢰를 얻어 스폰을 비롯한 취업비자를 진행하기로 하게 된다. 그야말로 뜬구름을 손에 쥐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취업비자 준비는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이었다. 때 마침 그때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가 미국에 와서 만나게 되었는데 퇴사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복귀 제안을 주셨던 가까운 분이셨고 기존 회사를 그만두고 새롭게 세팅되는 회사에 가게 되었으니 합류할 것을 제안받는다. 실제 국내 1등 통신사와 3대 음악 기획사가 손을 잡은 한국의 음악산업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굉장한 빅딜이었고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가슴 설레는 프로젝트였다. 또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기에 알 수 없는 아쉬운 감정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23. 귀국 / 양갈래 길. 고심 끝에 내린 힘들었던 결정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영사관에서 인터뷰를 본 후 취업비자를 받아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한국에서 제안받았던 프로젝트의 임시 사무실에 인사차 들렸고 선배들의 적극적인 제안에 다시 한번 고민 속에 빠지게 되었다. 


드디어 뜬구름을 잡았는데 오랜만에 한국의 반가운 지인들을 만나니 미국 생활에서 유일하게 힘들었던 향수병 비슷한 외로움이 마음을 한편을 흔들며 정말 많은 고민이 들었다. 미국에서 1년간 투자한 돈과 시간의 결실을 막 맺는 시기였고 한국의 새로운 프로젝트 역시 두 번 있기 힘든 정말 좋은 기회였다. 하필 이런 좋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옴을 원망하며 정말이지 힘들었던 선택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회사에 먼저 연락한 후 돌아갔고 진심으로 양해를 구하고 언제든 돌아오라는 감사한 말씀과 함께 일주일 만에 급하게 살림살이 들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선배들 및 동료들과의 재회 그리고 한국에서의 프로젝트가 내가 가진 능력을 조금 더 잘 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힘든 결정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에 합류해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세팅 멤버로 출발한다는 건 여러 일들이 많고 조금은 고생스럽지만 오랜만에 호흡이 잘 맞는 분들과 일하며 즐거웠고 새로운 음악 서비스와 회사에 대한 기대감도 커져 갔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대기업의 문화로 인한 여러 불합리한 상황들로 인해 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내 1차 적인 역할을 끝 냈을 때쯤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이 많이 안 좋아지고 마음의 상처도 심해져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분명 크고 안정된 회사였기에 많은 분들이 이번만은 견뎌보라며 조언해 주었지만 나도 놀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건강 회복이 우선이었다. 회사에서는 휴직을 권유했지만 이 곳에 오기 전 예상과 오고 난 후의 현실은 너무나 달랐고 직원의 태생적 형평성 문제는 앞으로도 변화하기 어렵다고 느꼈기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퇴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24. 전천후 크리에이터 / 참는 사람과 찾는 사람


퇴사 전후로 여행을 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을 정리해야 했다. 조직 문화의 문제일까 그것들을 참지 못하고 현실보다 이상을 꿈꾸는 내 문제일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비교도 안 되는 몸값을 가진 훌륭한 축구 선수도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으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고 순식간에 쓸모없어지기도 하며 잘 맞는 역할을 부여받는다면 순식간에 에이스가 되기도 한다. 결국 자신이 잘 적응할 수 있는 팀을 찾아 떠나는 것은 팀과 개인을 위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 역시 아직은 잘 맞는 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일을 매우 사랑하고 온전히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팀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한 간에 누군가는 참을성이 없다 하고 누군가는 도전정신이 많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실패라 말하고 누군가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모두 맞는 이야기다. 나는 가끔 내가 두려울 정도의 무모한 도전정신을 발휘하기도 하며 지나고 난 후 돌이켜 보면 왜 잠시 참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참는 사람과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이 있고 그것은 성향과 상황에 따른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을 논할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찾는 사람이고 행복하게 일하며 살 수 있는 그곳을 찾을 때까지 또 뜬구름을 잡으러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길은 꽃길이 아닌 비포장도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필 나는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라는 생각을 안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랩을 하며 무엇인가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뀌길 바라는 작은 혁명들을 소망해 왔고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며 살아왔다. 이러한 수 십 년간의 시간이 쉽게 변화 할리 만무하고 불합리함에 솔직히 소신껏 발언을 하는 것들이 결국 보수적인 조직의 관행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때로는 잊고 싶었던 지난 세월들을 억지로 다시 되짚어 봐야 했는데 밉고 원망스러웠던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감사하고 죄송했던 분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결국 선택은 자유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내 삶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많은 것을 잃었고 그 대가로 힘든 시간들은 온전히 스스로 버텨 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울림 없는 벽을 계속 두드리며 또 한 번 벽을 깨고 성장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여전히 매우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있다. 


언젠가 내 모든 삶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갈 때 그 순간에 후회하지 않고 싶다. 그것이 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어 왔고 나를 기억해 주는 모든 사람들이 내 의지를 왜곡되지 않게 받아들여주기를 희망한다.  




별책부록 - 이직왕떠돌이 소개 영상
나는 왜 이직왕 떠돌이가 되었는가? 파란만장한 역마살과 함께 살아온 한 남자의 솔직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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