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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Dec 26. 2019

또 그만둬 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 스물을 앞둔 이직왕떠돌이의 11번째 퇴사 이야기


마지막 회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되짚어 보는 것이 맞는 것일지 잘 모르겠다. 10년 이상의 사회생활을 하며 정말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다. 파란만장했던 시간들을 겪어오며 이제는 정확히 세는 것도 어려워졌지만 아마도 월급을 주던 회사를 그만둔 것은 열한 번째 정도 되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이직을 즐기는 것처럼 오해를 살만하다. 그러나 나 역시 처음부터 원하던 바는 아니었고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비로소 오랫동안 안정되게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나의 마지막 회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내가 그동안 많은 곳을 고생스럽게 떠돌며 경험했던 다양한 업무들과 네트워크 그리고 그것들을 응집시켜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곳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지는 데는 불과 2년조 차 걸리지 않았다.




국제적 떠돌이가 되다.


3년 전 이맘때쯤 나는 미국으로 떠날 채비에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과 몇 개월 전에는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생을 거의 음악산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을 해 왔고 중국에서 한국 음악들을 유통하고 알리는 일을 하기 위해 이직하여 베이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었다. 하필이면 내가 건너갔던 정확한 시기에 '사드(THAAD)'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한국과 중국의 사이는 급격하게 나빠졌고 급기야 중국이 한국의 문화까지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중국의 무자비한 황사처럼 내 미래를 뿌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는 마음을 가져 볼 법도 했지만 한국의 조직문화도 답답해했던 내게는 중국의 조직문화 역시 빠른 판단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중국의 매력적인 부분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짧지만 즐거웠던 중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시점 한국은 대통령 탄핵으로 부산했던 시기였다.


중국에 최소 3년은 있을 거라 각오하고 갔던 터라 한국에서의 모든 '짐'들을 정리한 터였고 모처럼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당시 나이는 36세였고 전에 여행하며 언젠가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미국에 무작정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미국으로 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은 학생비자뿐이었고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예상외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수월치 않을 거라 살짝 걱정도 했지만 결국 그 해 12월 31일 텍사스 오스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스틴은 한국에는 비교적 낯선 도시지만 미국 내에서는 유명한 라이브 음악도시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따지면 라이브클럽 하면 떠오르는 홍대와 같은 느낌이기도 한데 고등학교 시절 홍대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는 정서적으로 잘 맞았고 세계 3대 음악 마켓인 SXSW라는 음악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음악산업이 활발한 도시이기에 평생 음악산업 안에 몸을 담아온 나에게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이모와 사촌들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 안정감을 주는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오스틴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고 몇 달이 지난 후 막연하고 무모했던 내 도전에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음악 도시답게 음악 관련된 회사들이 있었고 그중 한국 분들이 주가 되어 일하고 있는 음악회사와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몇 달간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결국 내가 미국에서 일할 수 있게 스폰서와 취업비자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실제가 될지 알 수 없었던 막연하고 무모했던 미국 취업이 현실이 된 것이다.




두 가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오다.


취업비자를 준비하는 기간은 적지 않게 걸렸고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한 회사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전에 함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여행을 온다는 내용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라스베가스로 넘어가 그간 밀린 이야기들을 풀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합류할 예정이며 나도 합류하는 것을 고려해 보라고 권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창 미국으로 넘어와 고생 끝에 마침내 취업비자를 준비하던 중이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마음 한켠이 반응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여행과는 사뭇 달랐던 타지 생활로 향수병 비슷한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일종의 고비였던 시기였고 한국에서 진행될 프로젝트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선배들과의 재결합이자 서두에 말했듯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드디어 취업비자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의 미 영사관에서 인터뷰를 받고 비자를 받기 위해 귀국했다. 인터뷰 일정보다 조금 여유 있게 돌아왔던 터라 오랜만에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들도 보내고 그 사이 한국에서의 그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선배들이 임시로 마련한 사무실에 응원차 들렸고 다시 한번 합류 제안을 받고 또 고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에서의 시간들은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들로 달콤했고 생각보다 큰 프로젝트였기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건 나의 포지션이었는데 그간 해왔던 일들에 염증을 느껴 떠났던 거였기에 다시 이전과 같은 업무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선배들과 함께 일하던 곳을 떠나고 난 후에도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했기에 더 폭넓고 창의적인 일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3개월 간 초기 세팅을 한 후 내가 원하는 포지션을 맡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취중 약속을 받고 깊은 고민 끝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내 입장에서는 결국 이때 조금 더 확실히 했어야 할 것들을 당연하리라 여기고 그냥 넘어갔던 것들이 나중에 내게 문제가 되었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렇게 미국으로 잠시 돌아가 함께 일하기로 했던 회사 분들께 진심 어린 사과와 양해를 구했고 너무 감사하게도 이해해 주시며 언제든 돌아오라는 말씀을 전해 듣고 급하게 몇일만에 짐들을 정리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현타의 대미지


합병 과정에서의 예기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약속했던 3개월은 1년이 되었고 그동안 상황상 최소한의 인원으로 일 해야 했기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가고 있었다. 그와 대비해 내게 주어진 포지션은 아쉬움이 많았기에 결국 내 퇴사는 어쩌면 정해진 루트나 다름없었다. 회사 생활이 어디 뜻대로 될 리 있겠냐는 생각으로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훗날을 기약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지속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에서 처음 겪어보는 각종 거부반응이 일어나며 정신까지 매우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정말 스트레스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지경까지 가자 더 이상 참다가는 모든 걸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현타가 왔고 컸던 기대만큼 실망이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대미지는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종류의 타격이었다.




KO(Knockout)

회사는 계속된 합병을 통해 본격적인 조직이 세팅되기 시작했고 기대했던 바와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자 나는 억울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미국 취업비자라는 큰 결실과 결코 적지 않은 연봉 차이를 포기하고 돌아온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회사의 합병 과정에서 형평성이 과하게 무너지는 사건을 목격했고 결국 그래도 열심히 해 보자던 나의 각오는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보다 좋은 조건들을 뒤로하며 일종의 희생을 감수하고 합류해야 했었고 미국에서 장만했던 살림살이와 자동차 등 정리해야 했던 것들을 며칠 만에 급하게 정리하느라 금전적으로도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며 양보했던 연봉까지 더 하면 괜찮은 중형차 한 대 가격 정도가 되고 미국에 도전하기 위해 소모되었던 기회비용과 실질적 비용까지 치면 외제차 가격도 훌쩍 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선택했건만 회사 내 신분제도가 생겨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평성의 붕괴는 많은 잽들을 맞아가며 무방비 상태로 서있던 나에게는 카운터 펀지를 정면으로 맞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 순간 KO 되어 버리고 말았고 내 선택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는 냉정했고 나는 순수했다.


나는 감사하게도 의외로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단점도 만만치 않게 가지고 있다. 나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이며 원하지 않는 오지랖을 탑재해 누군가 내 어깨에 총대를 매어 주면 그 들을 위해 전투에 참전하는 것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언제나 스스로 약자에게 착하고 강자에게 당당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정작 약은 전략을 짜는 무리들에게는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러한 생각이 한국의 조직사회에 얼마나 반하는 짓인지 나는 잘 알고 있지만 결코 그것들을 무난한 사회생활을 위해 잃고 싶지는 않다. 이러한 신념들이 나를 함정으로 빠트리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함정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함정이 없는 곳을 계속해서 찾고 싶은 것 같다.


마치 토사구팽 당한 사냥개가 된 것 같아 원망에 원망이 꼬리를 물어 괴로웠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때로는 도움을 준 내게 오리혀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렸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나에게 도대체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닌 나를 더욱 심하게 괴롭힐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까지 따르지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원망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야 온전히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선택은 내가 한 것이고 그에 대한 결과 역시 내 몫이다. 그래서 나는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는 냉정했고 나는 순수했다.




여행을 통한 기준의 재설계


어쩌면 마음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으나 퇴사하기 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남은 연차들을 모두 동원하여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오랫동안 언젠가 가봐야지 생각만 했던 라오스. 낯선 곳에서 지난 시간 들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치열한 경쟁을 싫어하는 내 성향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성향은 한국 사회생활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중국이고 미국이고 밖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었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 또래들은 대부분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잘 살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철없는 어른이로 살아가고 있다. 성향이 억지로 바뀌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여행을 하며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인생의 방향을 재설계해야 했다.


우선 행복하게 살기를 갈구하기보다 불행하지 않게 단지 평온하게 흘러가듯이 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오스는 매우 적합한 여행지였다. 그곳은 매우 평온했고 때로는 익사이팅했으며 돈과 명예가 인생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인생은 생각보다 정말 짧고 내 인생의 대 부분을 치열하게 경쟁하라 강요당하며 살아온 것 같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강남에 살고 큰 회사에 다니는 것이 결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싫어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안부 한번 더 주고받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떠난다는 건 출발한다는 것


떠난다는 것은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End 가 아닌 And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회사를 떠나며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하였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알면서도 누구나 선뜻하기 쉽지 않은 것.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평균 대비 상당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온 삶이지만 이상과 현실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완전히 현실적인 직장인과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혹은 창작자 사이에서 여전히 헤메이고 있다.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지고 있으면 더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에 대한 판단은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앞으로 또 어떠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다시 건강한 정신과 몸 상태를 회복해야 사회라는 전쟁터에 참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들은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힙합에 빠졌고 그 이유는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을 가사로 적어 랩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좋았고 어떠한 수단으로든 내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공감대를 공유하는 일을 다시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 수단을 다양화 해 글과 영상과 또 어쩌면 음악으로 표출할 작정이다. 당분간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메말랐던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창작자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도전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떼었다.


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직왕떠돌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브런치의 이름도 바꾸었으며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다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회사를 떠나며 동시에 알 수 없는 내 미래의 어딘가로 출발했다.





*별책부록 -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 떠났던 라오스 여행 과정 영상.
(해당 영상은 여행정보가 주체가 아닌 퇴사를 앞둔 복잡하고 심난한 직장인 1인칭 시점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브런치에 담지 못한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영상과 함께 텍스트로 보다 따뜻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Travel in LAOS] 퇴사하기 전 떠난 라오스 떠돌기 'Prologue'


[Travel in LAOS] 퇴사하기 전 떠난 라오스 떠돌기 EP.1 '흔들림 그리고 평온'



[Travel in LAOS] 퇴사하기 전 떠난 라오스 떠돌기 EP.2 '꽃길과 비포장도로'



[Travel in LAOS] 퇴사하기 전 떠난 라오스 떠돌기 EP.3 '해적왕이 되고팠던 이직왕



[Travel in LAOS] 퇴사하기 전 떠난 라오스 떠돌기 EP.4 '찾는 사람과 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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