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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Mar 12. 2020

혹시 당신 주변에 창작자가 있다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일반적이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창작자(creator)
[명사] 새로운 것이나 예술 작품 따위를 창작한 사람.


우리는 많은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것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서론

바야흐로 대창작 시대가 도래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다양한 콘텐츠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콘텐츠만 소비해도 모자랄 만큼 넘쳐나고 무엇을 골라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방송이라고는 KBS, MBC, EBS, AFKN(주한미군방송)이 전부였고 SBS(서울방송으로 초기에는 서울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다.)가 개국한다고 자축 방송을 시청하던 때가 여전히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채널 선택의 여지가 매우 적었고 그나마 TV의 채널권도 부모님의 권한이었기에 많은 젊은 층들은 그 갈증을 라디오를 통해 풀어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파트 공지 게시판에 케이블 TV라는 것이 생기며 다양한 주제의 전문 채널이 생긴다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이 순간은 캡처한 듯 여전히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당시 설렘이 아직도 느껴진다. 하지만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케이블 TV는 유료 방송이었고 신청한 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채널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신청하지 않으셨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야 볼 수 있는 그림의 떡이 되었다. 마치 우리 부모님의 어린 시절 칼라 TV가 나왔지만 남의 집에만 있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등학교 시절 컴퓨터에 TV 수신기를 설치하면 TV처럼 볼 수 있다는 말에 용돈을 모아 용산 전자상가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여전히 케이블 TV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국 1990년대가 끝나갈 때쯤 내가 mnet 채널의 '힙합더바이브'라는 프로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겨우 케이블 TV를 집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종편 채널이 생겨났고 그들은 지상파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의 콘텐츠를 생산해 내고 있다. 어느새 인터넷이 보급되고 20여 년이 흘렀고 스마트폰이라는 괴물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유튜브, 넷플릭스는 코드컷팅(cord-cutting) 현상을 만들며 케이블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와 CD를 사서 들어야 했던 음악은 한 달에 몇 천 원만 내면 언제 어디서나 무제한으로 스트리밍 할 수 있게 되었고 비디오방에 가서 1박 2일 동안만 빌려 볼 수 있었던 영화는 OTT(Over The Top)서비스가 대체하고 있다. 만화방에 가서 빌려봐야 했던 만화는 웹툰으로 집에서 누워서 밤새도록이라도 볼 수 있으며 좋은 글을 읽기 위해 붐비던 서점은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이처럼 접근이 쉬워진 만큼 만들기도 쉬워진 시대가 되었다. 수년간 창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밑에서 어시를 해가며 어깨 너머로 노하우를 흡수해야 했던 세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무엇이든 쉽게 배울 수 있고 장비, 프로그램 또한 진화를 거듭하며 손쉽게 익힐 수 있게 되었다. 


화성학을 모르면 작곡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화성학을 아는 작곡가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문화생 시절이 필수였던 시절과 달리 재능만 있다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누구나 사진작가에 버금가는 사진을 찍고 보정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  수 있으며 PD가 아니어도 영상을 찍고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고 음성을 녹음해 팟캐스트에 올리며 그들의 시청자 혹은 청취자 등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본론

각설하고 서론이 길었지만 본론은 지금부터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만약 당신의 주위에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이 글은 그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창작자들은 각자 분야는 달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와 작사가, 글을 쓰는 작가, 영상을 만드는 유튜버, 그림을 그리는 작가 등 레드오션이 된 이 바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는 신념 하나로 어찌 보면 조금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나는 이 글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부류에 창작자와 인접해 일을 하는 실연자(연주자, 연기자 등)도 포함하고 싶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본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안정성, 지속성 등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야 하기에 본인은 괜찮을지 모르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쉽게 사는 등 본의 아니게 피해 아닌 피해를 입히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창작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실제로 생각보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간다. 


누구나 꿈은 있지만 그 꿈을 꾹 눌러가며 치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때론 부럽기도, 때론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치열함 뒤의 안락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기도 하고 사회생활 속에 이 리치이고 저리 치여 만신창이가 됐을 때는 그들이 한없이 마음 편해 보일 수 있다.  


나는 실제로 오랜 세월 동안 창작자와 직장인의 삶을 오가며 살아왔기에 내 안의 이중성에 언제나 스스로 놀라며 정체성의 혼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창작자의 입장일 때는 현실을 바쁘게 살며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가 막상 내가 그 속에 들어가면 자신의 꿈을 향해 한발 한발 꾸준히 내 딛는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양쪽의 삶을 다 힘겹게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가진 당위성이 그만큼 단단하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방구석에서 힘겹게 창작열을 불태우며 매일 맛있는 밥 대신 좌절을 맛보는 창작자들이 많을수록 소비자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더 좋은 콘텐츠를 선택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선택권을 가질 수 있고 힘겨운 사회생활 속에서 하나의 피난처가 더욱 즐거워질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소비자들이 많아질수록 과잉공급의 시대에 창작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희미해지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꿈을 이뤄내는 창작자들이 조금이나마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공생관계에 있는 것이다.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창작자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며 만드는 즐거움 대신 다양함 속에 취향을 저격당하며 즐기는 행복함을 영위할 수 있고 그것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결론

이 말을 하기 위해 앞서 수많은 말들로 이 페이지를 장식해 둔 것 같다. 만약 당신의 주변에 창작자가 있다면 혹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궁금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다면 딱 한 가지면 된다.


관심
 

그들이 만든 음악, 영상, 그림, 글 등 그게 무엇이건 조그마한 진심 어린 관심 하나면 된다. 만약 관심 정도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지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는 따뜻한 격려의 말과 콘텐츠에 대한 피드백이면 충분하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 콘텐츠를 추천해주고 알리는 것에 동참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후원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각자가 살아가기 바쁘고 내 코가 석자라면 그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약 당신이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있고 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전제 안에서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소비자로서 내 삶의 일부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창작물들을 만들어 내는 창작자 분들에게 너무 고맙다는 말을, 또 창작자로서는 창작자들이 활동을 지탱할 수 있게 마음껏 즐겨 주시는 소비자들에게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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