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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 May 30. 2021

아무튼, 이사

2년에 한 번, 나는 '이사병'을 앓는다.

 아무튼, 이사하기를 잘 했어. 이번에도.


 생애 12번째 집에 이삿짐을 대강 쑤셔놓고서 겨우 한숨 돌린 저녁에 든 생각이다. 나는 이사 후에 후회한 적이 없다. 아니, 거짓말이다. 여러 번 후회했다. 하지만 나는 길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짧게 후회하고 다음 이사를 계획한다. 나는 이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이사가 쉽고 즐겁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이사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아무리 이삿짐센터를 불러 포장이사를 해도 이사는 진이 쏙 빠지는 일이다. 이사 당일 아침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는 건 그저 피날레일 뿐, 이사를 결심한 이후부터 주말에 쉬지 못하고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한다. 부동산 사장님을 쭐래쭐래 따라 낯선 집들을 보러 다니거나 이사 전후에 끝없이 이어지는 짐 정리까지, 한 번 이사를 하고 나면 3kg은 빠지는 기분이다. (오해 없길 바란다. ‘기분’이다. 몸 썼으니까 캔맥주 마시면서 피로를 풀어야 한다며 술을 마셔대서 뱃살만 늘어나는 게 현실이다.)


 몸만 힘든 게 아니라 마음도 힘들다. 왜 이 많고 많은 집들 중에 내 소유의 집 한 칸이 없으며, 왜 나에게는 이 나이 먹도로 이 정도의 금액의 돈 밖에 없으며, 왜 나는 향후 최소 2년 간 내 삶의 질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함께 책임을 질 동반자가 없이 외로운 신세인지에 대해 곱씹으며 씁쓸해지는 타이밍이 이사를 준비할 때는 평소의 10만 배 정도는 더 많이 찾아온다.


11번째 집에서 나와서 사다리 차에 실리는 나의 살림살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사하는 걸 좋아하고, 이사하고 싶어서 2년에 한 번씩 마음이 울렁댄다. 계약만료가 6개월 전쯤으로 다가올 때부터 나는 혼술하기 적당해 보이는 식당 겸 술집을 가게 되면 부근 주택가는 없는지 두리번거리는데, 이게 전조증상이다. 그후에는 삭제했던 방 찾기 어플을 다운로드해서 가지고 있는 예산 내에서 갈 수 있는 매물을 훑어보고, 각 매물에서 회사까지 출근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살고 있는 동네가 어떤지 물어댄다. 그러다 계약 종료일이 다가오면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 없는, 이사를 해야만 하는 이유 한두 개를 억지로 만들어낸다. 사실 모든 점이 만족스러운 집은 없기 때문에 이건 어렵지 않다. 윗집 소음이 너무 심해. 창이 너무 작아. 짐이 많아졌는데 너무 좁아. 옆집 남자가 너무 시끄러워 등등. 그렇게 이사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눈 여겨 봤던 동네를 지정하고 그 동네에 있는 부동산에 걸어 들어가서 집을 보기 시작하고… 이후에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부동산에 들어가서 “저, 이사할 때가 되어서 방 알아보려고 하는데요.”라고 얘기할 때만은 신나고 설렌다.

 

 사실은 11번째 이사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사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참을성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소음이나 방 크기 등의 문제나 불만족스러운 점은, 사실 공동주택 생활을 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견디면서 지내는 건데 내가 인내심이 없어서 '이사'라는 선택지를 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근 10년 내에 가장 먼 거리로, 가장 큰 비용을 들여서, 계약 문제 때문에 가장 골머리를 앓으며 이사를 한 뒤에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런 모든 지긋지긋한 푸닥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이어지는 '좋아한다'는 정말 정말 좋아하는 건데. 내가 이렇게 이사 마니아였다고..?!


 대체 이사하는 게 뭐가 좋아서 나는 이렇게 이사를 많이 다니고 있는 거지? 나는 내가 왜 이사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이제야 - 14년 간 12번이나 이사하면서도 몰랐다! - 찬찬히 생각해보게 됐다. 그건 의외로, 아니 너무나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었고, 서른 넘어서부터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들여다 보지 않았던 내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는 일이 되었다. 진짜 이사할 때처럼 내 마음 구석구석을 정리해보았어요, 하는 식의 거창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나도 모르게 좋아하고 있던 이사의 몇몇 과정 혹은 순간들을 모아보면 의미가 있겠다는 정도? 이유도 쓸모도 없이 좋아하는 것들이 가끔은 살아낼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Nolan Issac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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