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게도 은퇴의 시간이 닥쳐왔다. 그동안 정들었던 사무실의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되었다. 짐을 정리하면서 무엇을 보관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 물건이 내 곁에 있게 되기까지 중요했던 의미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쉽게 많은 걸 버릴 수 있었다. 정서적으로 버리는 걸 멈칫거리게 하는 것들도 잠시 손에서 머뭇거리다가 버려지게 되었다. 섭섭함과 후련함이 교차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버리고 나니 미련도 없었다.
내가 수십 년을 넘게 지켜왔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익숙하게 자리 잡았고, 그 자리는 이제 낯선 장소가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삶을 같이 했었던 장소라는 게 너무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정말 쿨하게 자리를 비웠다. 나도 그럴 줄 몰랐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자리를 비우는 그때를 경계로 나는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넘어섰다. 사람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그 대가로 놀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가를 위해 열심히 노동을 한다. 노동을 하면서도 간간히 유희를 즐겼고 정말 무시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동 중심의 생활에서 유희란 뭔가 편치 않은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퇴직이라는 시점에서 느끼는 책임으로부터의 탈출은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었고 유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유희에 비중을 두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동이 중심인 삶에서도 이 상반된 두 가지가 잘 어울려 즐거운 노동이 되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돌이켜 보면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노동이 삶의 주요 부분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에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노동의 대가가 놀이의 여유를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끔 우연찮게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확보했어도 이를 제대로 활용해보지 못했다.
막상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퇴직에 즈음하여 생각한 것이 이젠 놀이를 생활의 주요한 목표로 삼고 살아야겠다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퇴직 후에 뭘 해야 할지 딱이 계획을 잘 세운 것도 아니다. 은퇴하면 어떻게 살아야지 고민하며 내놓는 게 은퇴 후의 생활 방침을 정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노동의 기간 동안 느꼈던 생각을 가다듬어 세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첫 번째로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 협동하면서 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봉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놀이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넘어선 지 6개월이 되었다. 실천 원칙에 따라 협동조합 두 군데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다. 일주일에 하루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놀이에 집중하기 위해 그동안 해오던 놀이였던 '배골당자'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