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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한 유니씨 Nov 29. 2023

'감응'에서 놓치고 '고사리'에서 만난
<시와 산책>

-책과 나 사이에<시와 산책>



<시와 산책>은 2년 전쯤 읽었다. 잘 봤다는 기억만 있지, 솔직히 떠오르는 구구절절은 없다. 도서관 대출이어서 다시 펴 보지도 못한다. 다만, 작가가 누굴까 글이 너무 좋다아아, 글보다 작가가 남았다.

감응의 글쓰기 10회 차 마지막 시간, 에밀리 디킨슨을 읽다가 <시와 산책>이 소환됐다. <시와 산책>에 에밀리 디킨슨이 나왔다는 이유였다. 은유를 비롯해 그 사실을 기억하는 여기저기 학인들에게서 그 책 좋다, 탄성이 쏟아지는 와중에 나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기야, 아직 읽지 않았다는 멤버들은 책 주문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빈 수레 요란하다고 끄덕인 고갯짓에 달려 올라오는 내용은 없는 형국. 과연 한정원 작가가 어떤 시인들을 등장시켰고 어떤 시구들을 엮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비극. 이참에 나도 주문할까, 아님 다시 대출할까 고민 고민. 고민의 이유는 단 하나, 나 죽으면 내 책 다 쓰레긴데 누가 이걸 다 처분할까 싶어서. 40 중반 이후로는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하고 아이 아이디까지 동원, 분기별 희망 도서 가능 수량을 꽉꽉 신청해 읽는 편이다. 물론, 책을 꼭 사는 경우는 지역(동네) 서점에 방문했을 때.


서울에서 놓친 <시와 산책>을 남해에서 만났다. 에밀리 디킨슨이 아니었다면 다시 만나지 못했을 <시와 산책>




그러는 사이 11주 차에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누군가 애정하는 책을 갖고 오겠다 했고, 10주 동안 같이 시집 읽던 학인들 대동단결, 제각각 책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꺼내놓기 시작했다. <시와 산책>이 떡 거기 있었다. 감응 반장이 지난주 수업 이후 주문하여 어제까지 밑줄 그으며 읽고 내놓는다고 했다. 내 책을 두고 갖고 싶은 책 고르기였는데, 희망자가 여럿일 경우 양보 없는 가위바위보가 허공을 갈랐다. 경품 추첨이든 가위바위보 내기든 당첨이나 승리와는 당최 거리가 먼 나는 <시와 산책>을 놓쳤다. 눈앞에서 다른 이의 손에 들린 <시와 산책>을 보고 있자니 왠지 더 갖고 싶었다. 다시 대출하든지 오프라인 중고매장을 뒤져봐야겠다, 아쉬움을 달랬다.


감응의 글쓰기 22기 뒤풀이. 쪼오기 눈앞에 <시와 산책>이 떡 놓여있었지만...



뒤풀이가 있던 주말에 동친들과 통영~남해를 여행했다. 여행 마지막 남해의 숙소(고사리맨션)는 ‘북 테라피’라 그래서 투숙객들에게 책 한 권을 랜덤으로 주는데, 미리 사연을 보내면 그에 어울리는 책을 주인장이 골라둔다고 했다. 이왕이면 나에 맞는 책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앞서, 짤막하나 구절구절 사연을 적어 보냈고 과연 어떤 책이 들어있을까, 숙소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책은 우리 방에 없었다. 다만 우리는 모던하면서도 씸플한 숙소 인테리어며 통창으로 보이는 바다뷰에 침을 튀기며 감탄사를 쏟아내기 바빴다. 책 한 권쯤 주인장이 잊었을 수도, 있는 동안 확인해서 받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고사리맨션의 하늘은...



주방 밖으로 작은 숲길이 나 있는데, 나무에 붙은 ‘북 샵’이라는 표지판이 반가웠다. 우리는 나란히 북 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 모양을 그대로 축소한 듯한 북 샵은 작지만 알찼다. 서가와 책들 외에도 물이며 음료가 든 작은 냉장고와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마늘이며 양념류까지, 투숙객에게만 오픈된 무인 공간을 꾸민 주인장의 세심함이 느껴졌다. 공간을 둘러보며 주인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연을 보냈는데 책이 없더라, 책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지금 북 샵 구경 중이다’. 그러던 중 서가에 놓인 <시와 산책> 이 눈에 들어왔다. 책이 나를 여기서 기다렸던 걸까 아님 내가 책을 찾아온 걸까 신비로운 기운을 느끼는데 주인장이 바로 전화를 해왔다.



고사리맨션, 남해. 머리털나고 남해는 처음인데, 고사리맨션덕분에 남해는 고사리이고 시와 산책이고 뾰족지붕이고 책이다.




내가 보낸 문자를 사연이라 생각 못 했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북 샵이면 거기 책들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가져가는 걸로 하면 어떻겠냐는 거다. 아따! 완전 땡큐베리뿅망치!! 아묻따 <시와 산책>으로, 가제트 형사처럼 손이 뻗었다. 내가 보낸 내용을 사연이 아니라고 해독한 주인장이 고마웠다. 그 문자를 읽고 책을 골랐다면 과연 <시와 산책>이 지금 내 곁에 있을까!


아니 근데, 내 글이 사연인 줄 몰랐다니, 내가 가는 길을 물은 것도 아니고 주변 맛 집이나 정수기 유무 등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이쯤에서 글쓰기고 나발이고 때려치워야 하는가? 의문의 1패였지만 <시와 산책> 만큼은 내 손에 남아 책 읽기의 변치 않는 희열을 고스란히 발산케 한다.

PS. 글쓰기를 때려치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주인장께 감사한 마음만 순도 높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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